I. 도시의 출근길은 괴로워
어이쿠, 벌써 3일차네요. 3박4일 일정은 확실히 짧습니다 ㅠㅠ 3일차인 오늘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오롯이 일본 수도권의 출근 지옥을 겪어야 합니다.
지옥철?
뭐, 한국에서도 하는데
일본이라고 다르겠어?
어차피 지옥철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엇비슷할 거라 생각하고 호기롭게 도카이도선 후지사와역으로 나왔습니다. 오늘은 도쿄역에서 멀리 치바현까지 가는 특급을 탈 겁니다. 도쿄역까지는 일반 전동열차를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도쿄로 향하는 전동열차에 오른 그 순간...
사...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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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씨;; 버틸 수가 없어서 딱 한 정거장만 이동하고 바로 내렸습니다... 차라리 출근길 1호선이면 버티겠는데, 무거운 카메라랑 렌즈를 넣은 가방을 짊어진 상태로 에어컨이 나오는 건지 마는 건지 구분 안 되는 찜통열차를 타고 도쿄역까지는 도저히 못 가겠더라고요...
내가 지옥철 타려고 여행 온 건 아니잖아
후지사와역에서 딱 한 정거장만 와서 지금은 오후나역입니다. 그냥 오후나역부터는 도카이도선 특급(특급 쇼난)을 타기로...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1호선 타고 가려다가 인파에 질려서 무궁화호로 환승한다 정도 되겠습니다. 특급을 그냥 막 타도 되는 패스권 사용자니까 지옥철에서 부대낄 필요가 없습니다.
저 안에 타고 있을 직장인들,
모두 다 화이팅!!
기왕 이렇게 된 거 오후나역에서 열차 사진이나 좀 담고 가기로 합니다. 우에노도쿄라인으로 운행 중인 E231계 전동차네요. 무려 15량이나 되기에 끝이 안 보입니다. 수도권 1, 2, 3, 4호선 10량보다도 훨씬 더 길고, 평소 10량 전동차를 담던 감각으로 구도를 잡았는데도 꼬리가 안 보입니다.
반대편 아타미 방향 전동차도 담아줍니다. 사진에 딱 10량 정도만 안 잘리고 다 나오네요 ㅋㅋㅋ 1호선 10량 전동차로 구도 잡아오던 그 짬바가 어디 안 가는 듯... 자세히 보시면 5량+10량으로 두 편성을 하나로 엮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열차는 타카사키선 직통인가 보네요. 우리네 1호선도 운행 형태가 참 다양한데, 이 동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한 운행 패턴이 존재합니다.
아, 드디어 특급 쇼난 E257계 전동차가 들어옵니다. 이 열차는 그래도 특급이니까 자리는 있을 겁니다 ㅠㅠㅠ
이제야 좀 편하게 가겠네
여담으로 패스권 사용자에게 있어 특급 쇼난은 미리 좌석을 지정해도 되지만, 그냥 빈 자리에 가서 앉아도 됩니다. 승무원이 검표할 때 패스권과 여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고요. 빈 좌석인지 아닌지는 좌석 상단에 녹색 또는 빨간색 LED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빨간색 등은 좌석이 빈 상태이니 앉아도 된다는 뜻, 녹색 등은 좌석이 점유된 상태이니 앉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시나가와역을 지날 즈음 창밖으로는 세찬 비가 쏟아집니다. 재밌었던 점은 일반 전동열차 객실과는 달리 특급 쇼난 객실에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 최소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승객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돈은 없지만 체력은 있는 젊은이들은 꾸역꾸역 일반 전동열차 타고, 여유는 좀 생겼지만 체력은 없는 중장년층은 특급으로 몰리는 게 아니었을지 ㅋㅋ... 대충 둘러봤을 때 한량처럼 유유자적 여행하는 사람은 저 혼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휴... 좀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특급으로 갈아탄 덕에 도쿄역까지 편하게 왔습니다. 그나저나 서울역도 그렇고 도쿄역도 그렇고 맨날 공사 중이네요. 이제 치바현으로 가는 케이요선, 소토보선 특급열차 와카시오를 타러 갑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잠깐 츄오선 승강장에 들렀습니다. 특급 와카시오 출발 시각까지 좀 남아서 몇 장 담아보려고요.
특이하게도 도쿄역 츄오선 승강장은 다른 노선들과 달리 한 층 더 위에 있습니다. 이미 도쿄역 부지가 꽉 찬 상황에서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신칸센 승강장을 확충해야 했는데, 츄오선 승강장을 위로 올리고 그 빈 공간으로 나머지 노선 승강장을 조금씩 밀어 해결했다고 합니다. 승객 입장에서는 츄오선 타러 가는 동선이 괴로워졌지만, 철덕 입장에서는 덕분에 커브와 급경사가 생겨 열차 사진은 역동적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미래지향적으로 생긴 E353계 전동차도 운 좋게 찍었네요. 도쿄행 특급 아즈사로 운행 후 회송하는 것 같습니다.
II. 도시를 빠져나와
자, 이제 특급 와카시오를 타러 갑시다! 특급 와카시오는 도쿄역 남단 지하에 위치한 케이요선, 무사시노선 승강장으로 가야 합니다. 사진을 찍고 있던 3층 츄오선 승강장에서 가려면 아주 막장환승이랍니다 ㅎ... 안 그래도 복잡한 도쿄역인데 환승 거리도 무시무시하니 열차 시간 15분 전부터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휴~ 다행스럽게도 복잡한 도쿄역에서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케이요선 승강장으로 넘어왔습니다. 공항행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탈 수 있는 요코스카선, 소부 쾌속선 지하 승강장과는 또 다른 곳입니다!
승강장에는 이미 특급 와카시오로 운행할 E257계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4량이었나 5량이었나, 아주 짧은 열차였습니다. 저 위에서 보신 특급 쇼난에 투입되는 차량과 도색만 다르고 같은 차종입니다.
좌석은 우리의 ITX 시리즈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ㅋㅋㅋ 그저 콘센트가 있어서 행복할 따름이네요. 평일 러시아워가 끝난 시각에 도쿄역을 출발하는 열차라 그런지 빈 자리가 많았습니다.
도쿄역 케이요선 지하 승강장을 발차한 열차는 금세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마도 하네다에 내리는 비행기가 아닐까 싶네요.
열차는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도쿄만을 끼고 달립니다. 여담으로 도쿄 디즈니랜드도 이 케이요선을 타면 금방 갈 수 있답니다. 웃긴 건 사실 도쿄 디즈니랜드는 도쿄가 아니라 치바현에 있다는 점 서울에 없는 서울랜드
세찬 비가 내립니다. 이날 일기예보는 거센 비가 내리는 것으로 나왔지만, 그냥 모든 걸 운에 맡기고 치바현으로 향했습니다.
열심히 달려서 마침내 치바현 이스미시(市)에 위치한 오하라역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비는 잠시 그쳤네요.
오하라역 밖으로 잠시 나왔습니다. 화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일본의 중소도시 철도역 느낌이네요.
자, 그런데 오하라역은 사실 한 지붕 두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이 작은 구멍가게 같은 역사는 이스미 철도의 오하라역입니다. 이스미선이라는 단선 노선이 여기서 출발합니다.
반면 이쪽은 이스미선 오하라역보다 훨씬 덩치가 크죠? JR동일본 소토보선 오하라역입니다.
JR 오하라역에서 이스미선 오하라역을 바라봅니다.
이스미선 오하라역에서는 이렇게 이스미 철도 굿즈를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았습니다...! 철도무스메 상품도 있는 것 같네요?
이 한 칸짜리 디젤동차를 모티브로 만든 필통은 정말 사고 싶었는데 다른 곳부터 둘러보고 오하라역으로 되돌아왔을 땐 이미 굿즈샵이 문을 닫은 뒤였습니다 ㅠㅠ 진작에 살 걸... 아무튼 요정도로 아이쇼핑을 하고
본격적으로 이스미선 답사를 시작합니다! 아침에 후지사와를 떠날 땐 거대한 도시 속의 먼지 한 톨이 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한적한 시골 마을 어딘가로 천천히 달려가는 느림보 완행열차를 탑니다. 달랑 한 칸짜리 원맨카 열차입니다. 꼴랑 한 칸짜리라서 열차(列車)라 하기 민망하네요. 객차나 화차를 여러 개 늘어놓았다는 의미로 '列' 자를 써 '열차(列車)'라 하던데, 이건 그럼 열차가 아닌 건가? ㅋㅋ
일본의 한적한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원맨카의 표준 같은 객실입니다.
아 ㅋㅋㅋㅋ 근데 진짜 감동이었던 부분은 이런 원맨카에서도 무료 와이파이가, 그것도 끊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제공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JR동일본의 특급열차 나리타 익스프레스나 오늘 타고 온 와카시오에서도 와이파이가 툭하면 끊어지고 품질도 영 별로였는데 이스미선 열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골 로컬선은 대부분 출퇴근 시간대 통근, 통학 수요로 간신히 유지된다고 합니다. 평일 낮 시간대라 그런지 승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시 비는 내리고
덜덜거리는 디젤동차 특유의 진동과 소음에 몸을 맡기고 흐느적흐느적 목적지로 향해 갑니다. 열차는 아직도 25미터짜리 정척레일을 쓰는 시골 철길을 흔들흔들 달리고, 철겅철겅 일정한 간격으로 레일 이음매와 차륜의 파찰음이 울려 퍼집니다. 여행자는 상념에 잠기네요.
나는 무엇을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치바현의 시골 마을로 가는 것일까...
자연에 동화되어 가는 것 아닌가 싶은 철길을 계속 달립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만개한 수국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쿠니요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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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반대편 열차가 우리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네요. 이스미선은 단선 철길이라서 이렇게 맞은편 열차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 빨리 가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진리.
고생한 열차와 제 자신을 함께 담습니다.
하차한 이곳은 치바현 오타키군(郡) 오타키마치(町)에 위치한 이스미선 오타키역입니다.
안 그래도 작은 대합실의 한 구석에는 이렇게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III. 선로를 따라 걷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미선 도보 답사를 시작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비가 와서 다행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햇빛이 쨍쨍한 날이었으면 감히 이스미선을 따라 트레킹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않았을 것 같네요. 그렇다고 비가 온다고 선선했던 건 아니고 푹푹 찌는 와중에 햇빛만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ㅋㅋ
오타키역에서는 타고 왔던 열차가 꽤 오래 정차해 있었습니다. 덕분에 역에서 좀 떨어진 건널목까지 걸어와 타고 왔던 열차의 출발 모습을 볼 수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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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키역에서 한 십여 분 정도를 계속 비를 맞으며 걸어서
오타키 성(城) 천수각을 배경으로
이스미선 열차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식 성(城)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거의 없고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열차 뒤에 배경으로 성이 들어가 있으면 뭔가 애니메이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일본에서 찍은 사진이오~ 싶은 느낌도 진득해져서 좋더라고요. 마침 딱 열차 지나갈 시점에는 비가 그치고 하늘이 약간 밝아져서 녹음과 대비되는 열차의 노란 색감을 살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2023년 11월 에히메현 오즈 성
작년에 에히메에서 봤던 오즈 성의 모습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느낌의 오타키 성이었습니다. 한편 작년 오즈 성도 그렇고 이번 오타키 성도 그렇고 비를 맞아가며 찍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ㅋㅋ
계획으로는 오타키 성까지만 찍고 다시 오타키역으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비도 그쳤겠다 좀 더 모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한적한 농촌 마을의 분위기에 매료된 탓이기도 했고요. 비가 그친 이후 풀냄새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혼자 온 여행이니까
일정을 바꾸는 것도 내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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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키 성이 보이는 곳에서 이스미선을 따라 20분 정도를 더 걸어 논 위로 은행나무 한 그루와 신사가 서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철길 반대편으로 저 같은 철덕이 한 명 숨어(?) 있습니다 ㅋㅋ
만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포인트는 녹음과 확실하게 대비되는 새빨간 토리이.
때가 되니 건널목의 경보기가 울리고 열차가 통과합니다. 열차도 샛노란 색깔이라 사진이 확 밝아진 것 같습니다.
논 한가운데 서 있는 신사와 은행나무 뒤로 샛노란 한 칸짜리 디젤동차가 지나갑니다.
아, 나는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치바현의 시골길을 걸어왔구나
열차 한 대만 찍고 이동하자니 뭔가 아쉬워서 반대편 열차까지 한 번 더 담았습니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니 비슷하지만 살짝 다른 구도까지 담을 심산이었습니다. 이 열차까지 담느라 전체적인 일정이 많이 딜레이 되었지만 뭐 어떻습니까? 이러려고 혼자 다니는 거죠~
< 덧. >
▲ 구글지도 닛타노역 리뷰 사진에서 펌
사실 이스미선은 봄에 철도 주변 어디를 가나 벚꽃과 유채꽃이 만개하는 것으로 알음알음 유명합니다. 봄에 도쿄를 갈 예정이다,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풍경을 담고 싶다 하는 분들께는 꼭 방문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 구글지도에서 찾은 코미나토 철도선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