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소설] 복합기 앞에 서서

곽서영은 복합기 앞에 서있다. 표준임대차계약서 12부를 스캔해야 한다. 소나무원룸 12세대를 갖고 있는 임대사업자가 일주일 전 신고하고 간 표준임대차계약서를 집이 한 채도 없는 곽서영은 스캔해야 한다. 그것이 곽서영이 할 일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소나무원룸에 살고 있는 12세대 임차인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표준임대차계약서를 스캔해두는 것이 곽서영이 할 일이다. 계약서를 스캔해둬야 스캔해둔 계약서를 근거로 임대사업자에게 임대료를 1년 이내에는 올리지 못하게 할 수 있고, 1년이 지나도 5%까지만 올리게 할 수 있다. 그것이 곽서영이 할 일이다. 그녀가 일하는 근거인 법에서는 그것을 국민의 주거안정이라고 불렀다.

곽서영은 국민의 주거안정이 자신의 귀에서 진물이 반년이 넘도록 흐르고 있어도 버티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지난 반년 넘게 스캔했던 표준임대차계약서의 임차인 1,500명의 주거안정만으로 자신이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또 임차인 1,500명의 주거안정이 자신이 버티며 일을 하는 이유가 아예 아닌 것은 아니었다. 곽서영이 얼마간의 다리로 서있는 테이블이라면 국민의 주거안정은 테이블 다리 중 짧은 다리이긴 할 것이었다. 다만, 그것은 아주 짧았지만 또 길어질 수 있는 다리였다. 그녀는 그 다리가 길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얼마간의 다리 중 다른 하나는 “지금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며 밥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어제도 낮에는 진물이 흐르는 귀에 수화기를 대고 있었고, 저녁에는 자면서 귀를 긁고 베개피에 진물을 묻혔던 그녀는 아침에 귀에 연고를 바르고 약을 먹고선 다시 출근해 12부의 계약서를 들고 복합기 앞에 서있다. 불균형한 얼마간의 테이블 다리를 가지고. 그래도 작년이었다면 계약서 12부를 어느 세월에 다 스캔할지 그녀는 막막했을 것이다.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의 복합기는 여러 장을 스캔하거나 복사할 때 사용하는 용지투입기에 용지를 넣으면 용지가 자주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에 비해 지금 그녀는 덜 막막해하고 있다. 올해 초에 김수진 주임에게서 이 복합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많은 매수를 한 번에 용지투입구에 넣으면 용지가 잘 걸리는 반면 1~2장 정도씩 넣으면 덜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장을 한 개의 파일로 스캔하고 싶으면 복합기에 ‘다음 원고 있음’ 버튼을 사용하면서 1~2장 씩 끊어서 스캔한 후 스캔이 다 끝나면 ‘다음 원고 없음(송신)’ 버튼을 누르는 것이었다.

곽서영은 김수진이 설명하는 것을 목을 빼고 듣고 있었다. 나름의 스캐너 사용하는 기술을 알려준 김수진은 곽서영이 좋아하지 않았던 직원이었다. 김수진은 곽서영이 바쁠 때에도, 예를 들면, 10분, 더 짧으면 5분에 1통 간격으로 전화를 받고, 방문 민원인이 와서 그 민원 응대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고, 그 전화를 받는 와중에 자신의 모니터 위로 새로운 전화 메모 포스트잇이 붙여지고, 전화를 끊고 그제서야 다시 방문 민원인을 응대하려고 할 때, 곽서영에게 모니터에 붙여두었던 포스트잇을 봤냐며, 그 민원인한테 전화를 했는지 확인을 꼭 하는 사람이었다. 김수진이 남겨둔 포스트잇에는 전화번호, 전화 온 시간과 함께 “전화요망”이라는 글자가 정자로 써져있었다. 일부 직원은 곽서영이 전화를 많이 받고 있으면 ‘전화 꼭 안 해도 될 겁니다, 본인이 급하면 전화 또 하겠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곽서영은 그런 말을 하는 직원이 편했다. 하지만 김수진은 꼭 정색을 하며 전화를 걸어줬냐고 확인하곤 했다.

서로 다른 팀에 있었을 때는 웃으면서 인사하는 사이였는데 막상 같은 팀이 되니 곽서영은 그런 김수진을 보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곽서영은 김수진을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친하게 지냈을 사람이지만, 서로 마냥 화기애애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그래도 나중에라도 같이 일했던 기억을 계기로 더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런 김수진 옆에 서서 곽서영은 목을 빼고 이 사무실의 스캐너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다. 곽서영이 목을 빼고 있는 것은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한 일환이었으며, 자신의 귀에 진물이 덜 흐르게 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곽서영은 그 방법을 잘 기억해둔다.

그 방법을 사용한 후로 곽서영은 몇 가지 방법을 스스로 더 찾아냈다. 이 스캐너는 주로 처음 스캔을 시작할 때 2번째 장에서 용지가 잘 걸리며, 일단 2장만 용지투입구에 넣어 스캔한 후에는 여러 장을 한 번에 스캔해도 용지가 비교적 잘 걸리지 않았다. 곽서영이 스캔해야하는 서류는 보통 임대차계약 한 건당 10장인데, 이 사실을 발견한 후로는 그녀는 2장만 먼저 용지투입구에 넣은 후 2장이 스캔되고 있을 때 재빠르게 ‘다음 원고 있음’ 버튼을 누른 다음 나머지 8장을 용지투입구에 넣어 하나의 파일로 스캔했다. 곽서영은 그 방법으로 스캔을 할 생각으로 12부의 계약서를 들고서 복합기 앞에 서있다.

12부, 그러니까 한 부당 10페이지씩 총 120페이지를 한 번에 스캔하는 것을 이 복합기는 감당하지 못한다. 한 부씩 스캔하기로 한다. 한 부씩 스캔하는 것도 이 복합기는 버거워할 것이다. 곽서영은 소나무원룸 201호 표준임대차계약서의 스테이플러심을 제침기로 제거한다. 손으로 스테이플러심을 제거하면 손에서 피가 나기 쉽기 때문에 제침기를 사용한다. 스테이플러심이 제거된 용지 2장을 용지투입구에 먼저 넣고, 2장이 다 스캔되기 전에 ‘다음 원고 있음’ 버튼을 재빠르게 누른다. 그리고 나머지 8장을 넣는다. 다행히 용지가 걸리지 않았다. ‘다음원고 없음(송부)’버튼을 누른다. 이제 201호 계약서의 스캔이 끝났다. 나머지 11개 호수의 계약서가 남았다. 하지만 곽서영이 나름 찾아낸 이 방법으로도 4번째 계약서부터는 용지가 걸린다. 곽서영은 용지투입구의 뚜껑을 열어 아코디언 모양으로 접힌 용지를 빼고 손으로 펴서 다시 용지 투입구에 넣는다. 10장을 5번을 나눠 2장씩 나눠서 스캔한다. 7번째 계약서부터는 2장씩만 스캔해도 용지가 걸려 이제부턴 1장씩 스캔한다. 스테이플러심을 제침기로 제거하는 소리, 스캐너 버튼 누르는 소리, 용지 투입구로 종이가 빨려들어가는 소리, 용지 걸리는 소리, 구겨진 용지를 펴는 소리, 스캐너 돌아가는 소리가 반복된다. 표준임대차계약서 12부의 스캔을 마친 곽서영은 마지막으로 12부의 서류를 한 데 모아 책상에 두드리며 삐져나온 종이가 없게 가지런히 한 데 모아 ‘대’자 집게로 집어둔다. 곽서영은 이 정도면 무난하게 스캔을 마쳤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다.

---
또 왔습니다.
앞편을 읽으셔야 좀 더 이해가 잘 되실 것 같아요!
블로그에 전체 연재작이 올려져있으니 많이 놀러와주세요 ㅎㅎ
https://blog.naver.com/writer_ia/223544464606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9-10 22:5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