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도의 야구
호주의 수도는 시드니나 멜버른이 아니라 캔버라입니다. 캐나다의 수도는 토론토나 밴쿠버가 아니라 오타와입니다. 앞선 두 나라처럼 미국 역시 수도를 헷갈리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미국의 수도는 자유의 여신상, 타임스 스퀘어, 월 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이나 할리우드, 칼텍, 코리아타운이 있는 LA가 아닙니다. 바로 백악관, 국회의사당,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이 있는 워싱턴 D.C.입니다.
미국 정치의 중심지인 D.C.에는 여러 야구팀이 머물었습니다. 1901년부터 1960년까진 미네소타 트윈스가, 1961년부터 1971년까진 텍사스 레인저스가 워싱턴을 연고지로 삼았습니다. 2005년 앞서 얘기한 두 팀이 지금의 연고지로 떠나간 이후 텅 비어있던 워싱턴에 한 팀이 정착합니다.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연고지로 했던 레 젝스포 드 몽레알,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그 주인공이었으며 워싱턴 내셔널스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첫해부터 지구 꼴찌에 그친 후 꾸준히 하위권을 전전한 내셔널스였지만 대신 얻은 신인 지명권으로 재건을 꿈꿉니다. 2009년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2010년 브라이스 하퍼, 2011년 앤서니 렌던 등 최고의 재능을 소유한 유망주를 지명하며 내셔널스의 전력은 서서히 올라갑니다. 마침내 2012년 지구 우승을 차지하여 D.C. 역사상 79년 만의 가을야구를 치르며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2. 침전, 그리고 반전
이후 꾸준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만, 월드시리즈 진출에는 번번이 실패하던 내셔널스는 2019년 큰 변화를 겪습니다. 하퍼가 총액 3억 3천만 달러에 달하는 FA 계약을 맺고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한 것입니다. 2012년 신인왕, 2015년 MVP를 차지한 그는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습니다. 역대 신인 타자 최고 계약금을 안겨주기까지 했던 내셔널스의 실망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습니다.
타선의 한 축이었던 하퍼의 공백은 쉽게 메우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즌 초반 여러 선수가 부상에 신음하며 내셔널스는 하위권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5월 24일 뉴욕 메츠에게 4연전을 모두 패하며 시즌 성적은 19승 31패. 하퍼를 영입한 필리스가 승승장구하며 지구 선두로 치고 나갈 동안 꼴찌가 된 내셔널스의 2019년은 우울과 실망이 가득할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셔널스의 덕아웃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5월 9일 영입된 헤라르도 파라입니다. 유쾌한 성격인 그는 열정, 근성, 그리고 긍정적인 리더십의 소유자였습니다. 등장 음악인 상어 가족에서 따온 파라의 세리머니는 동료들과 팬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전달하며 침울했던 분위기를 바꿔놓습니다. 내셔널스는 이후 무려 74승 38패를 올리며 자신들을 슬프게 했던 필리스와 메츠를 모두 제치고 와일드카드 자격을 얻어냅니다.


3. 워싱턴의 사나이들
내셔널스를 이끄는 감독은 데이브 마르티네스 감독입니다. 선수 시절 나름 제 몫을 하는 타자였던 그는 대표적인 지장 조 매든 감독 밑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아나갑니다. 2018년 내셔널스에 부임해 첫해 82승 80패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기도 했지만 2019년 대반전을 이루며 지도력을 증명합니다. 카리스마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할 정도로 부드러운 인품의 소유자인 그는 선수단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리더였습니다.
내셔널스의 최고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선발진이었습니다.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 중 하나이며 무서울 정도의 승부욕을 가진 맥스 슈어저, 부상 때문에 완전히 발휘되지 못했던 잠재력을 폭발시킨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FA로 영입되어 훌륭한 활약을 보여준 패트릭 코빈 등은 MLB 어느 팀과도 맞상대가 가능한 전력이었습니다. 더욱이 불펜이 강하지 않은 내셔널스였기에 세 선수의 호투는 소중한 자원이었습니다.
타선 역시 선발진과 발맞추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경력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리그 최고의 3루수 자리를 공고히 한 렌던, 2년차 징크스 따위는 담장 밖으로 날려버린 당돌한 유망주 후안 소토, 준족으로 베이스를 휘저은 트레이 터너 등의 선수들은 맹타를 휘둘렀습니다. 앞서 말한 파라, 프랜차이즈 스타인 라이언 짐머맨, 하위 켄드릭 등의 베테랑들 역시 팀의 선전에 이바지합니다.


4. 이변의 연속
극적으로 진출한 와일드카드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밀워키 브루어스였습니다. 팀 내 최고의 타자이자 MVP 후보인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불의의 부상으로 이탈한 브루어스였지만 단판 승부라는 점에서 방심은 금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브루어스의 타선이 시즌 중 부상을 얻은 뒤 페이스가 떨어져 있던 슈어저를 초반 공략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구원 등판한 스트라스버그의 역투, 소토의 적시타로 가을야구의 첫 관문을 통과합니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LA 다저스였습니다. 과거엔 박찬호 선수, 현재는 류현진 선수의 소속팀으로 잘 알려진 다저스는 NL 최다승을 거둔 강팀이었습니다. 2승 1패로 몰리기까지 한 내셔널스는 슈어저의 활약으로 4차전을 가져옵니다. 마지막 5차전 다저스에 초반 리드를 허용했지만, 렌던과 소토의 연속 홈런으로 클레이튼 커쇼의 가을 잔혹사를 늘린 내셔널스는 연장 10회 초 켄드릭의 만루홈런으로 승리합니다.
챔피언십 시리즈의 상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습니다. 포스트시즌만 되면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해 ‘가을 좀비’라는 별명을 가진 카디널스는 11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명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셔널스의 기세는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상황. 아니발 산체스의 깜짝 호투를 비롯해 선발진의 힘으로 카디널스를 압도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D.C. 역사상 86년 만의 월드 시리즈 진출에 성공합니다.


5. 역사를 만들다
월드시리즈에서 맞닥뜨린 상대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였습니다. 2017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애스트로스는 천재 단장 제프 러나우와 명감독 A.J.힌치가 이끄는 최강팀이었습니다. 게릿 콜, 저스틴 벌랜더, 잭 그레인키의 선발진과 호세 알투베, 알렉스 브레그먼, 요단 알바레즈의 타선은 명실상부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체력적인 우위를 점함에도 내셔널스의 우세를 예상하기엔 쉽지 않았습니다.
적지에서 펼쳐진 1차전과 2차전. 내셔널스는 이번에도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던 콜과 벌랜더를 무너뜨리며 2승 0패로 앞서나간 것입니다. 심지어 2차전의 경우 12점을 뽑아내며 대승을 거두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애스트로스의 저력은 무서웠습니다. 내셔널스 홈에서 열린 3차전, 4차전, 5차전을 모두 승리하며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애스트로스의 우승은 당연지사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애스트로스 홈에서 열린 6차전 내셔널스의 선수들은 투혼을 발휘합니다. 스트라스버그의 온 힘을 다한 역투, 침묵을 깨고 살아난 타선 등에 힘입어 불리한 판정까지 극복하고 승부를 7차전까지 늘린 것입니다. 한해의 마지막 경기. 어깨가 마비되는 증상을 겪었음에도 등판한 슈어저는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마침내 렌던과 켄드릭의 홈런포로 역전을 이룬 내셔널스는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최초의 원정 4승이라는, 너무나도 극적인 모습으로 이뤄냅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첫맛은 씁쓸했으나 뒷맛은 달콤했던 2019시즌을 마무리한 내셔널스는 또다시 이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월드시리즈 MVP를 차지한 스트라스버그와 맹타를 휘두른 렌던이 FA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투타의 기둥이었던 두 선수가 빠진다면 그 공백은 너무나도 클 것입니다. 하지만 하퍼를 떠나보내고도 우승을 차지한 내셔널스의 저력이라면 다가올 2020년에도 분명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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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번 글은 대략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따끈따끈한 소재라 빠른 속도로 쓸 수 있었네요. 올해는 수도를 연고로 한 팀들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한국의 두산 베어스와 미국의 워싱턴 내셔널스는 우승을,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준우승을 차지했죠. 원래 우승권인 나머지 두 팀과 달리 내셔널스의 선전은 멋진 드라마였습니다. 다음 글은 영국으로 가보죠. 리버풀 FC의 이야기,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7-03 23: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