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칠게 빛나는 도시
영화광들에겐 액션 영화 ‘로보캅’의 배경지로, 음악광들에겐 래퍼 에미넴의 고향으로, 게임광들에겐 어드벤처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무대로 익숙할 도시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Motor City’, ‘Motown’ 등으로 불리며 부흥하던 도시는 자동차 산업의 쇠락으로 범죄와 빈곤의 도시로 변모합니다. 하루하루 고된 삶을 이어나가는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스포츠를 통해 위안을 얻곤 합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스포츠팀 중에서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도시의 역사와 그 결을 같이 하는 팀입니다. 자동차 피스톤 부품을 생산하던 사업가에 의해 창단된 피스톤스는 NBA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팀 중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그저 그런 팀이었던 피스톤스는 1981년 아이재아 토마스를 지명한 후 1988/1989시즌과 1989/90시즌 연속 파이널 우승을 차지하며 구단 사상 첫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포인트 가드의 정석이자 엄청난 카리스마를 자랑한 토마스, ‘어둠의 왕자’로 악명 높던 더티플레이의 전설 빌 레임비어, 역시 거친 수비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릭 마혼, 강백호의 모티브로 유명한 악동이자 리바운드 천재 데니스 로드맨, 팀에서 가장 신사적인 성격과 별개로 끈적한 수비를 자랑하던 조 듀마스 등이 명장 척 데일리의 지휘 아래 똘똘 뭉친 피스톤스는 ‘Bad Boys’로 불리며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자리 잡습니다. 특히 ‘조던 룰’로 불리던 폭력에 가까운 거친 수비는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초기 우승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2. 우승을 갈망하던 명장
조던과 시카고 불스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Bad Boys’의 주역들이 노쇠하면서 피스톤스는 리그의 주도권을 내줍니다. 그랜트 힐, 제리 스택하우스 등의 선수들이 에이스로 활약하며 분전했지만, 우승엔 역부족이었던 피스톤스는 2003/04 시즌 호랑이 같은 카리스마의 소유자이자 노련한 경험의 명장 래리 브라운 감독을 선임합니다.
브라운 감독은 선수 시절 1964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을 수상한 바 있으며 한동안 NBA와 경쟁했던 ABA에서 올스타에 수차례 선정되었던 스타였습니다. 은퇴 이후 ABA 올해의 감독상을 3차례 수상하며 명장으로 이름을 높인 그는 캔자스 대학교의 감독으로 취임해 대학 농구 NCAA 우승을 이끌기도 합니다. NBA로 돌아와 샌안토니오 스퍼스,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인디애나 페이서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등 유수의 구단을 이끕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장이었던 브라운 감독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우승이었습니다. 스퍼스의 데이비드 로빈슨, 클리퍼스의 론 하퍼, 페이서스의 레지 밀러, 세븐티식서스의 앨런 아이버슨 등
당대를 넘어 NBA 역사에 길이 남을 슈퍼스타들과 함께했지만, 번번이 무릎 꿇었던 브라운 감독은 피스톤스에 부임하여 이번에야말로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일념 아래 팀을 강하게 조련합니다.


3. 돌아온 나쁜 녀석들
당시 피스톤스의 선수 중 브라운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전설적인 선수들에 비견될 만한 명성의 소유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센터 벤 월러스는 작은 키 때문에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도 못했던 선수였으며 포인트 가드 천시 빌럽스는 실패한 유망주로 평가받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개성 넘치는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뭉쳤을 때 그 저력은 화려한 이름값을 자랑하는 선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벤 월러스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Big Ben’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앞세워 철벽같은 수비를 보여주는 최고의 수비수였습니다. 빌럽스는 ‘Mr. Big Shot’이라고 불릴 정도로 클러치 타임에 빛나는 선수였으며 팀의 공격을 유려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습니다. 두 선수 이외에도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체력과 정확한 슛을 자랑하는 ‘RIP’ 리차드 해밀턴, 긴 팔과 다리를 활용하여 공수 양면에서 감초 역할을 해준 테이션 프린스 등은 각자의 역할을 100% 이상 수행하며 매력적인 팀을 만들었습니다.
2003/04시즌 순항하던 피스톤스는 일시적으로 빠진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라시드 월러스를 영입합니다. 불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좋은 친화력을 보여주던 그는 큰 신장에 걸맞은 든든한 수비, 유려한 개인기와 매끄러운 슈팅으로 팀의 마지막 톱니바퀴 역할을 합니다. ‘Bad Boys’ 시절을 연상케 하는 경기력은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결국 피스톤스는 NBA 우승을 가리는 파이널 무대까지 진출합니다.


4. 리그 최고의 명문과 전설
파이널에서 맞닥뜨린 상대는 리그 최고의 명문 LA 레이커스였습니다. 동부의 보스턴 셀틱스와 함께 리그를 지배해왔던 서부의 강자 레이커스는 그야말로 전설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선수들이 거쳐 갔던 팀입니다.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 자바, 매직 존슨, 제임스 워디 등 NBA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선수들이 영광스러운 역사를 써 내려갔던 레이커스는 2003/04시즌 역시 눈부신 명성의 전설들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조던과 불스를 이끌며 2번의 3연속 우승 ‘3-Peat’을 이루어낸 바 있는 최고의 명장 필 잭슨의 지도력은 레이커스에서도 1999/00, 2000/01, 2001/02시즌의 3연속 우승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으로 ‘Most Dominant Ever’, 자타공인 리그 최고의 선수로 불리던 샤킬 오닐, 조던 이후 나타난 수많은 후계자 중 가장 빛나는 별이었던 ‘블랙 맘바’ 코비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의 우승을 견인하던 쌍두마차였습니다.
게다가 최고의 수비력으로 조던을 고전하게 한 바 있으며 신랄한 트래쉬 토크를 구사하던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게리 페이튼, NBA 통산 득점 2위에 빛나는 매서운 공격력과 변함없는 꾸준함으로 존 스탁턴과 함께 유타 재즈를 이끌던 칼 말론이 우승 반지를 위해 합류하면서 일명 ‘반지 원정대’가 꾸려집니다. 말 그대로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팀이었던 레이커스의 우승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5. 당돌한 악동들, 거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다
하지만 브라운 감독과 피스톤스 선수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팀을 강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우승을 이루진 못한다는 비아냥을 받던 감독과 커리어 내내 저평가와 무시 속에서 묵묵히 공을 잡던 선수들은 전문가들과 팬들에게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레이커스란 거함은 오히려 최고의 상대였습니다.
사실 페이튼과 말론은 둘 다 커리어 막바지에 이르러 노쇠한 선수들이었습니다. 이미 전성기가 꺾인 지 오래인 그들을 빌럽스와 라시드 월러스가 압도하면서 레이커스의 우세를 점치던 분위기는 사라집니다. 리그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던 브라이언트마저 페이튼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포인트 가드 역할 겸업과 무명 선수였던 프린스의 질식 수비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면서 승부의 무게추는 피스톤스로 기우는 듯 싶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닐은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보여주며 동료들의 부진을 만회합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제어할 수 없어 유일한 단점인 자유투 실력을 노린 ‘Hack a Shaq’ 작전밖에 막을 방법이 없다고 여겨지던 오닐을 막아선 것은 벤 월러스였습니다. 수비왕 경험이 있던 벤 월러스의 필사적인 수비는 오닐의 득점을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으나 그의 체력을 완전히 소진하기엔 충분했고 라시드 월러스, 프린스 등의 도움 수비가 곁들여지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오닐에 대한 수비를 실현합니다.
해밀턴의 비수 같은 득점들은 레이커스를 고이 잠들게 하는 장의사의 손짓과도 같았습니다. 결국, 역사에 길이 남을 업셋은 4승 1패, 피스톤스의 완승으로 끝이 납니다. 레이커스는 파이널 3차전 플레이오프 역사상 최저 득점인 68점에 그치는 등 한 번도 100득점 이상 올리지 못하며 압도당합니다. 파이널을 중계한 ABC 아나운서 알 마이클스의 평대로 “하나가 되어 싸웠던, 슈퍼스타 하나 없는, 그저 함께 뛰는 사나이들”은 디트로이트 시민들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안겨줍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이듬해 피스톤스는 또다시 파이널에 진출하면서 2년 연속 우승을 노리지만 명장 포포비치와 팀 던컨, 토니 파커, 마누 지노빌리의 ‘Big 3’가 이끌던 스퍼스에게 아쉽게 패합니다. 브라운 감독이 건강 문제로 지휘봉을 내려놓고 벤 월러스와 빌럽스가 차례로 팀을 떠나면서 짧았던 ‘Bad Boys’ 2기는 해체됩니다.
디트로이트의 침체와 맞물려 오랜 부침을 겪던 피스톤스는 2018/19시즌 공격 리바운드의 달인 센터 안드레 드러먼드와 엘리트 빅맨 블레이크 그리핀의 트윈 타워를 앞세워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비록 강팀 밀워키 벅스에게 0승 4패로 압도당하며 탈락했지만, 최근 부흥 조짐을 보이는 도시가 내일을 향한 희망을 품게 만든 한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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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동안 먹구름과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오래간만에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날에 올리는 글입니다. 공교롭게도 글의 주인공 디트로이트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연상되는 날씨네요. 추석 귀성길에는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가족과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명절 지나고 난 뒤 더 좋은 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27 17: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