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0년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축구단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의 삶과 530년 만에 장례식을 치른 리처드 3세의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인 레스터. 축구종가인 잉글랜드의 도시답게 레스터 시민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팀인 레스터 시티 FC에 아낌없는 사랑을 보냅니다. 맨체스터, 리버풀, 런던 등 다른 대도시의 팬들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는 열광적인 응원 열기는 원정 경기를 치르는 상대 선수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1884년 창단된 레스터 시티는 예로부터 여우 서식지이자 여우 사냥터로 유명했던 지역의 역사로부터 ‘The Foxes’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축구황제’ 펠레의 헤딩을 막아내는 세기의 선방을 비롯하여 무수한 선방을 기록하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을 이끈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골키퍼 고든 뱅크스, 잉글랜드 선수 월드컵 통산 득점 1위이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4강의 주인공 게리 리네커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 레스터 시티에서 활약했습니다.
2010년 태국 재벌인 위차이 시와타나쁘라파가 소유한 킹 파워 그룹이 구단을 인수한 후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2부 리그에 머물러 있던 레스터 시티는 2013/14시즌 챔피언쉽 우승으로 프리미어 리그에 승격합니다. 승격한 후 맞은 첫 시즌인 2014/15시즌 치열한 강등권 경쟁 끝에 14위로 시즌을 마치며 잔류에 성공한 레스터 시티는 다가오는 2015/16시즌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2. 떠돌이 소방수
팀의 프리미어 리그 승격과 잔류를 지휘한 나이젤 피어슨 감독이 아들의 동양인 비하와 성 추문으로 경질된 후 레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는 바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었습니다. 라니에리 감독은 풍부한 경험을 자랑하는 노련한 감독이었지만 전문가들과 팬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습니다.
평범했던 선수 시절을 뒤로하고 35살의 나이에 감독 경력을 시작한 그는 SSC 나폴리, ACF 피오렌티나, 발렌시아 CF,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첼시 FC, 유벤투스 FC, AS 로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AS 모나코 FC 등 굵직한 구단들을 지휘했습니다. 피오렌티나에서 코파 이탈리아, 발렌시아에서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끈 라니에리는 구단을 재정비하고 안정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저평가받는 감독이었습니다. 리그 우승을 단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한 점, 후임 감독들이 훨씬 더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냈던 점, 뚜렷한 전술적 색채가 눈에 띄지 않는 점 등으로 인해 유수의 명장들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게다가 레스터 시티에 부임하기 직전 맡은 그리스 국가대표팀이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어 경질된 것도 라니에리 감독에 대한 우려를 높였습니다.


3. 공포의 외인구단
레스터 시티 선수들 역시 라니에리 감독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스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팀의 주포를 맡은 제이미 바디는 무려 8부 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였습니다. 5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주급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장 일을 병행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전자 발찌를 찬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가 레스터 시티에 이적할 때 지급된 이적료는 단 100만 파운드로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하면 푼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015년 새로 입단한 중앙 미드필더 은골로 캉테는 프랑스 리그의 하부리그 팀에서 뛰던 선수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활동량으로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였으나 화려한 기술이나 절묘한 패스를 구사하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왜소한 체구의 그가 세계에서 가장 거친 리그 중 하나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큰 활약을 펼칠 것이라 기대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측면에서 활약하던 리야드 마레즈 역시 프랑스 하부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였습니다. 알제리 이민자 가정 출신인 그는 레스터 시티로 이적할 때까지만 해도 무명 선수에 불과했습니다. 레스터 시티엔 세 선수 이외에도 마크 올브라이턴, 크리스티안 푹스, 로베르트 후트 등 전 소속팀에서 내쳐졌던 선수들, 대니 드링크워터, 카스퍼 슈마이켈 등 유망주 시절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선수들이 뛰고 있었습니다.


4. 여우 사냥에 나선 영국 최고의 거인들
라니에리 감독과 레스터 시티 선수들이 경쟁해야 할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와 함께 세계 4대 리그로 손꼽히는 최고의 무대였습니다. 막대한 자금을 소유한 부자 구단주들, 천재적인 전술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감독들, 세계 각지에서 영입된 슈퍼스타들, 폭력도 불사할 정도로 열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팬들이 어우러져 있는 프리미어 리그는 가장 우승하기 어려운 리그로 평가받습니다.
그런 프리미어 리그를 지배하는 6개의 구단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박지성 선수의 소속팀으로 익숙한 리그 최다 우승의 전통적인 강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그 우승 횟수 2위이자 잉글랜드 클럽 중 챔스 최다 우승을 자랑하는 명문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유일의 무패우승과 FA컵 역대 최다 우승에 빛나는 아스날 FC, 라니에리 감독이 이끈 바 있고 첫 연재글의 주인공이자 신흥 강호에서 꾸준한 강팀으로 자리매김한 첼시 FC,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부자 구단주 셰이크 만수르가 이끄는 최근 최강팀 맨체스터 시티 FC, 한국 축구의 간판 손흥민 선수의 소속팀이자 무시할 수 없는 강호 토트넘 핫스퍼 FC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도 실패한 감독과 실패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레스터 시티가 6개의 강팀, 통칭 ‘Big 6’를 꺾고 우승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잉글랜드 도박 사이트에서 레스터 시티에 부여한 배당률은 5000:1. 레스터 시티와 잉글랜드의 축구 전설이자 지금은 축구 해설가이자 스타 방송인인 리네커조차 친정팀이 우승한다면 속옷차림으로 방송을 진행하겠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였습니다.


5. 한여름 밤의 꿈, 크리스마스 선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리그 개막 이후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순조로운 시즌을 보내던 레스터 시티가 아스날에게 2:5로 패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맨유와 비기고 첼시에게 승리를 거두는 등 레스터 시티의 돌풍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고 어느새 우승 경쟁에 당당히 뛰어듭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지만 살인적인 경기 일정으로 악명 높은 박싱데이 역시 기존의 약체팀 돌풍과 달리 무난히 극복한 레스터 시티에 점점 이목이 쏠립니다.
4-4-2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라니에리 감독의 단단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 전술, 폭발적인 속력과 정확한 골 결정력으로 리그 11경기 연속 골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바디, 신출귀몰한 개인기와 드리블로 매 경기 마술을 부리는 마레즈, 경기장 전역을 누비며 공수 양면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캉테, 주장 웨스 모건과 후트의 철벽 센터백 듀오, 신들린 선방의 듬직한 수문장 슈마이켈, 각자의 위치에서 견실한 활약을 보여준 올브라이턴, 드링크워터, 푹스, 오카자키 신지, 대니 심슨 등 선수들의 활약이 어우러져 레스터 시티가 꾸는 꿈은 점점 현실이 되어갑니다.
유일하게 레스터 시티에게 2패를 안긴 아스날을 제외한 나머지 ‘Big 6’ 팀들과도 대등한 전적을 가져가며 자신들의 실력이 진짜배기임을 증명한 레스터 시티. 떠돌이 수선공이라는 의미인 ‘The Tinkerman’으로 불리던 라니에리 감독은 ‘The Godfather’, 대부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레스터 시티 선수들 역시 다른 유명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라고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리그를 단 2경기 남겨 두고 2위를 달리던 토트넘이 첼시와 무승부를 거두며 레스터 시티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이 확정됩니다. 여우 군단의 마법이 기적을 이룬 순간이었습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동화 속 기적에 비견될 우승 이후 레스터 시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자신의 약화와 경쟁팀의 강화를 동시에 일으킨 2015/16시즌 캉테의 첼시 이적과 2018/19시즌 마레즈의 맨시티 이적, 수비진의 노쇠화, 신규 영입 선수들의 부진 등으로 2016/17시즌 12위, 2017/18시즌 9위, 2018/19시즌 9위에 그치게 된 것입니다. 팀의 우승을 이끈 라니에리 감독은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며 경질되었고 구단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열정적인 팬이었던 구단주마저 헬기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꿋꿋하게 팀에 남아 최선을 다하는 바디와 유망한 젊은 선수들, 새로 선임된 공격적인 전술의 지략가 브랜던 로저스 감독 등은 오늘도 2015/16시즌의 마법을 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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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강렬했던 태풍이 지나가고 대명절 추석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학우 여러분들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과 맛있는 명절 음식 드시면서 행복한 한가위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명절 치르는 걸 돕다 보니 다음 글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만큼 더 좋은 글을 쓰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미리 귀띔을 드리자면 주제는 농구를 생각 중입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27 17: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