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일이다. 생물학이란 학문은 요즘 워낙 방대해져 한 학기는 말할 나위도 없고 한 해에 가르치기도 숨이 가쁠 지경이다. 그래서 교과서의 한두 장은 스스로 공부한 후 리포트를 작성해 내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그 학기에도 진도를 다 못 나갈 것 같아 비교적 덜 중요하거나 혹은 혼자서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에 대해 리포트를 내도록 지시했다.
며칠 수 밤늦게 책상머리에 기대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에 거슬리는 실수 하나가 여러 리포트에서 반복되는 걸 발견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성질의 실수가 아니었기에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첫 리포트부터 다시 검토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상당수의 학생들이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리포트를 제출한 것이다. 글씨체나 장정(제본에서 책을 매어 표지를 붙인 것)만 바꾸어 제출한 '지능적인' 리프토들이었다.
때론 컴퓨터가 우리를 참으로 비겁하게 만든다. 나는 그 문제의 리포트들을 들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차 없이 처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그들이 무슨 교훈을 얻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독한 교수에게 걸려 재수 없이 당했다고 투덜대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실에 들어가 아무런 설명 없이 그들의 이름을 칠판 구석에 적고 한 사람씩 날 찾아오라고 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그 많은 학생들을 일일이 따로 만났다.
그리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거창한 훈계를 했다.
교수라 해도 학생들을 나무라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들에게는 왠지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자네는 세상이 다 부러워하는 서울대생이네. 물론 자네의 노력으로 들어온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자네의 복일세.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말일세.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부여받았고 누구보다도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 자네가 거짓말도 불사하며 나만의 이득을 위해 산다면 저 바깥에 있는, 자네보다 훨씬 덜 가진,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네만큼 잘살 수 있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찌 살라는 말인가.
능력 있고 복받은 자들이 더 가지려고 움켜쥐면 이 세상은 날로 어두워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진 자의 거짓말은 그 죄과(罪過)가 그만큼 더 무거울 수밖에.
나와 한 가지만 약속을 하면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겠네.
지금 이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오로지 정도(正道)만을 걷겠다고 나와 약속하게. 그래도 자넨 절대 굶어 죽지 않을 걸세."
그때의 학생들이 지금도 내게 가끔 편지를 보낸다. 나 역시 그 학년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거짓말도 법의 질책을 받아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다.
우리들은 늘 사랑하는 이에게 또는 자기 스스로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산다.
'넌 할 수 있어.'라며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자기기만 능력이야말로 때론 인간을 성공시키는 가장 큰 힘이다.
- 최재천. 서울대 생명 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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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의 대사가 생각나네요.
"큰 힘은 큰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9-29 15: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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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연재 2 유쾌하고 감동적이며 놀라운 이야기, 자작 연재 콘텐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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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등록일 : 2012-08-26 17:32:57 | 글번호 : 14821 | 0 6192명이 읽었어요 모바일화면 URL 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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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베껴서 낸 서울대생들에게 대처하는 한 교수의 자세.tx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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