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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귀마다 어둠이 꾸역꾸역 쌓여있었다. 미로 같은 그 골목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했고, 한낮에 들어와도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난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로 발을 힘없이 놀리다가 순간 아찔했다. 코앞에 검은 양복을 빳빳하게 차려입은 장신의 남자가 불쑥 산처럼 솟아있었다. 남자는 그대로 부딪힐 뻔 한 내 몸을 부드럽게 잡더니 저런, 공부에 취했군요, 라고 심해의 물고기가 낼만한 낮고 낯선 음성을 냈다.
"보아하니 학생도 '꽉 찬' 모양인데……"
난 겹겹이 엉켜있던 수심과 함께 약간의 호기심과 의심이 섞인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처럼 선글라스를 낀 채 의미심장하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마치 입으로만 웃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의 억지웃음 같았다.
"'확장'이 필요하면, 이리로 연락해요."
매끈한 재질의 종이는 명함 크기였는데, 사무적인 글씨체로 11자리의 휴대폰 번호가 큼직하게 적혀있었다. 채 무슨 생각이 들기도 전에 별안간 마른 바람이 훅 일었고  난 휘청휘청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며 헤매다가 다시금 아찔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그제야 익숙한 가로등이 보였다. 나는 마치 꿈을 꾼 듯이 황망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검은 남자는 온데간데없었고, 난 모르는 사이 남자가 준 명함을 주머니에 꽂아넣어둔 채였다.

  19번, 19번, 19번……
"너 79점이다 야, 3점이나 올랐네."
번호순으로 점수가 죽 나열해있는 표를 훑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3점 올랐다? 나도 기억 못하고 있는 지난 기말고사 평균점수를 이놈이 알고 있다는 건가? 이건 69점이라는 점수보다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놈은 짐짓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3점이나'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발버둥 쳐도 넌 내 밑이야, 놈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매일 그렇게 남으면서 열심히 하더니. 봐, 결과가 좋잖아. 내가 다 기쁘다 야."
난 놈이 비꼬는 걸 알면서도 그 체를 낼 수가 없었다. 난 근 두 달을 죽을 듯 공부했다. 18번인 놈의 점수를 힐끗 훔치니 88점이었다. 그 정도면 못해도 전교 20등 안이었다. 속이 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씨발 니 좃이다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난 완벽하게 지는 거였다. 아냐, 더 열심히 해야지,  난 순박하게 웃으면서 드라마 속 성실한 학생의 것 같은 쾌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때 거울이 있어 들여다봤다면, 난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처럼 입만 억지로 웃고 있었을 거다. 젠장.

9교시를 마치고 올해 초등학교 졸업한 동생이 만든 것 보다 못한 저녁급식을 먹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놈 때문, 아니 나 때문이었다. 뭐가 문제인걸까. 난 매일 11시 반까지 학교 독서실에 남아 지긋지긋한 교과내용을 머리에 입력하고 또 입력했다. 집에 가서는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5시 반에 일어났다. 고등학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됐다. 난 미칠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미칠 듯이 공부했다. 그래, 물론 과부하가 걸린 내 뇌는 가끔 먹은 것을 토해내곤 했다. 하지만 난 하루 17시간 반을 학교에서 보냈다. 그깟 것 다시 주워 먹을 시간을 충분했다. 그런데 왜……?
"젠장."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성큼성큼 독서실로 향했다. 왜긴 왜야. 아직 부족한 거야. 난 작년에 한 IQ검사에서 143이 나왔다구. 그러니까 절대 머리가 안 좋은 게 아냐. 아직 부족한 거야! 한쪽 주머니에선 명함 크기의 바삭거리는 종이가 굴러다녔지만 난 그것을 구겨버렸다.

나무 재질의 책상이 울렁거렸다. 온몸의 무게가 머리에 실린 듯 뜨겁고 갑갑했다. 난 같은 문장을 정확히 열세 번째 읽고 있었다. 난 내가 서른 자도 안 되는 문장을 못 외운다는 사실보다 읽은 횟수를 기억한다는 게 더 끔찍했다. 이젠 정말 '꽉 찬' 것일지도 몰랐다. 우겨넣고 우겨넣어 먼지 한 점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게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난 의자를 뒤로 기울여 칸막이 너머 죽 앉아있는 다른 놈들의 등을 흘겼다. 놈들은 왜 멀쩡한 거지? 놈들은 어떻게 88점씩, 90점씩 맞는 걸까. 놈들과 내 것의 용량이 비슷하다면, 그럼, 내 머리는 쓸데없는 쓰레기들로 이미 꽉 차있던 걸까!  
"젠장."
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구겨진 종이. 11자리의 휴대폰 번호.
'확장이 필요하면 이리로 연락해요.'  
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휴대폰을 꺼내며 자리를 박찼다.

남자는 도시 외곽 허름한 폐공장 부지에 자신이 운영하는 시술소가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학생인 것을 감안해 처음 20만원에 매달 2만원씩 3년을 받겠다고 했다. 게다가 그것을 다 더해도 일반인 비용의 반값밖에 안 된다고 했다. 난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탈탈 털어 두툼한 봉투를 손에 쥔 채 그가 말해준 주소를 찾아갔다. 영화에 나오는 미서부의 어느 카우보이 마을처럼 oo공장의 부지는 쓰레기만 굴러다니는 메마른 땅이었다. 녹슨 드럼통은 구석구석 선인장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이름 모를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 공장 외벽을 난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사실은 공장이 어떻게 생기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과 의심이 독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연락을 했을 때 미리 물어봤어야 했다. 10살짜리의 머리로도 의심할 수 있는 문제였다. 확장이라니, 꽉 찬 머리를 청소해준다니. 그게 '시술소'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건 대체 무슨 시술이란 말인가. 흡수? 드릴? 바느질, ……뇌수술?
"젠장."
찌그러진 캔이 발치를 스쳐지나갔고 해는 시들고 있었다. 어쨌든 난 돈을 쥐고 있었고 내 성적을 올려줄 사람은 바로 저기 안에 있었다. 난 최후의 결정을 내린 비운의 주인공처럼 장엄하게 공장을 향했다.

"왔어요?"
남자는 전에 만났을 대와 똑같은 차림이었다. 핏기 없이 매끈한 흰색 피부에 검은 양복, 선글라스, 그리고 묘한 웃음.
"정확히 어떤 시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15분이면 끝날 거고, 집에 가서 한숨 푹 자면 멀쩡해질 겁니다."
"뇌수술인가요?"
"보안유지를 위해시술방법이나 과정은 말씀해드리지 않습니다. 정 못 미더우시면 돈은 내일 부쳐주세요."
남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작은 알약을 건넸다. 수면제에요, 남자는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난 마른 침을 삼키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벌려 알약을 던져 넣었다.
"편안하게 기대세요."
거의 수평인 등받이 의자에 몸을 뉘이자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시멘트 천장이 빙글빙글 돌며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환상과 동시에 난 잠에 빠졌다.

눈을 떴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채였다.
"20분 걸렸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아 네, 난 대답은 했지만 아직 몽롱했다.
"필요 없는 기억을 제거했습니다.  구석에 쓰레기처럼 쌓여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을 치워드린 것뿐이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제 양껏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점점 머리 쪽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궁금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이리로 연락 줘요."
남자가 건넨 것은 지난번에 준 것과 모양과 크기가 그대로면서 번호만 달리 적혀있는 명함이었다.
"또 뵙지요."
또 뵙긴 개뿔. 난 나른한 몸을 끌고 공장의 낡은 철문을 걸어 나왔다. 남자는 등 뒤로 웃고 있을게 뻔했다.

확실히 가벼워졌다. 이젠 같은 문장을 열세번씩 읽을 필요가 없었다. 몇 시간씩 외우고 책을 들여다봐도 난 지치는 법이 없었고 하루하루가 상쾌했다. 그렇게 친 모의고사에서 난 학력우수자 명단 4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 학력우수자 명단은 전교생 600명 중 100명만 오를 수 있었고, 난 항상 90등대아니면 이름도 없었다. 괄목할 성취였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앞에는 3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놈이 있었다. 놈은 명단에 오른 내 이름을 보더니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눈 깜짝할 새에 네가 이런 성과를 거둔 게 난 참 기쁘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건 치욕이었다. 모의고사에 이어 더 중요한 정기고사가 남아있었다. 그 놈한테만은 질 수 없었다. 난 미친 듯이 흡수했다. 매달 빠져나가는 돈은 아까운 축에도 못 꼈다.

이젠 남자에게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은 다달이 잘 빠져나갔고 시술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아니, 만족스러웠었다. 시술 후 정확히 넉 달 뒤 내 머리는 눈에 띄게 전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는 일이 많아졌다. 내 입에서는 두 달 만에 '젠장'이 흘러나왔다.
"젠장."
얼마 안 있으면 정기고사였다. 난 남자에게 다시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명함은 잘 보관해뒀었다. 신호음이 흐르고 전에 없이 경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무슨 문제라도?"
이거, 확장하면 보통 언제까지 가나요.
"일반인은 보통 1년에서 1년 반? 학생은, 글쎄요. 왜, 벌써 다됐습니까?"
그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그런가보네요. 추가 확장이 필요하시면, 지금 입금하던 것의 두 배씩만 추가로 해주시면 됩니다."
이젠 정말로 큭큭 웃는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난 전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생각해보죠, 하고 끊었다.
"젠장."

아무리 수를 써봐도 그만한 돈을 구할 순 없었다. 그 돈을 벌자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다. 난 하루에 남는 시간이 단 30분도 없었다. 다급했다. 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급합니다, 돈은 나중에 꼭 낼 테니……
"안 됩니다."
그는 거절했다. 난 애원했다.
"안 됩니다."
좀 도와주세요.
"그럼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그는 웃기 시작했다.
"과학 시간에, 아니면 화학 시간에 배우겠죠? 용액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물질을 녹일 수 있는지."
크크크.
"곰곰이 생각해봐요."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난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려 했지만 중학교 때 기억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난 인터넷을 뒤졌다. 간단했다. 물을 더 넣던지, 녹아있는 물질을 빼던지, 용액의 온도를 높이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가지 밖에 없었다. 가열. 용해도를 높이기 위한 가열. 더 많이 기억하기 위한 가열.
"젠장."
어쩔 수 없다. 놈을 이기기위해선 이 방법 밖에다. 통구이가 되더라도……. 난 식용유에 머리통을 처박았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27 10: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