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알렉스의 추억

“트랜스-퍼시픽 하이퍼루프 터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보안 검사와 바이오메트릭 인증을 완료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안전과 편안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렉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뉴욕 중앙역의 하이퍼루프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광활한 유리 돔으로 덮인 터미널 안에서 알렉스는 티켓을 스캔하고, 바이오메트릭 인증을 거쳐 캡슐에 탑승했다.
하이퍼루프 캡슐은 전 세계를 연결하는 복잡하게 얽힌 초고속 진공 튜브 네트워크를 통해 신속하게 목적지까지 사람들을 어디로든 자유롭게 이동시켜 주는 차세대 운송수단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마치 거대한 신경망처럼 세계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경로가 무수히 갈라져 있어 사용자가 원하는 목적지로의 접근을 자유롭고 빠르게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 최첨단 진공 캡슐은 초전도체 기술과 자기부상 기술을 결합하여,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고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었다. 캡슐은 특수 제작된 진공 튜브 내에서 마찰 없이 이동함으로써 소리보다도 더 빠른, 시속 2,500km의 속도로 질주했다. 하이퍼루프 진공 캡슐의 등장은 전 세계를 물리적으로 매우 가깝게 만들어, 장거리 여행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캡슐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형 캡슐과 VIP를 위한 고급 서비스를 목표로 한 소형 캡슐로 이원화되어 운행되었다. 알렉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이자 혁신적인 기술 개발자로, 여러 유니콘 기업의 핵심 개발자로서 상당한 양의 스톡옵션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과 재력은 소형 하이퍼루프 캡슐을 이용할 VIP로서의 자격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알렉스가 캡슐 안에 들어서자, 그의 발걸음 소리가 부드러운 카펫 위에서 살짝 울려 퍼졌다. 최상의 편안함을 위해 세심하게 설계된 좌석, 캡슐 내부를 우아한 빛으로 밝혀주는 은은한 조명, 필요한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최신 기술로 완비된 인터페이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4인용 캡슐 안에는 알렉스와 이브뿐이었다. 알렉스가 캡슐의 개인 좌석에 앉자마자, 그의 시야는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로 변했다. 이 디스플레이는 캡슐의 진공 튜브 벽을 통해 실제 외부 풍경을 중계하는 것처럼 디자인되어 있어, 마치 창밖을 직접 보는 것과 같은 생생한 경험을 제공했다. 디스플레이에는 터치스크린 패널이 활성화되면서, 화면에는 승객이 원하는 여행 모드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등장했다.
“정지 모드, 움직임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패널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이퍼루프로 이동할 때, 소형캡슐을 탄 개인은 캡슐의 움직임도 선택할 수 있어서 정지 모드를 선택하면 움직임이 거의 없이 부드럽게 이동할 수 있어 독서나 취침을 할 수 있었고, 움직임 모드를 선택하면 롤러코스터처럼 역동적으로 빠른 속도감을 즐길 수 있었다. 알렉스는 오늘의 여정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움직임 모드’를 선택했다.
문이 천천히 닫히고,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캡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가속하던 캡슐은 몇 분 뒤 갑자기 속도를 높이며 무음에 가까운 속도로 질주했다.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캡슐은 여러 차례 급격하게 방향을 전환했고, 때로는 급상승하거나 급하강하는 아찔한 루프를 그렸다.
알렉스는 이 모든 움직임을 즐기며 디스플레이로 펼쳐지는 외부 풍경을 바라보았다. 짜릿한 기쁨이 올라왔다. 그것은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의 풍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캡슐은 곧 지하 터널로 진입했다.
잠시 후, 안내 방송이 다시 흘러나왔다.
“캡슐이 곧 해저 터널을 통과할 예정입니다. 슬로우 버튼을 누르시면 이제 잠시 창문을 통해 바닷속 풍경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해저 터널 구간은 약 4시간 지속될 예정이며, 이 구간을 지나면 곧 한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해저 터널의 진공 튜브는 해저의 지형과 환경을 고려하여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였고, 지진이나 해저 흐름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설계를 도입하여 안전한 여행을 보장하고 있었다.
해저에 진입한 후 알렉스가 슬로우 버튼을 누르자, 캡슐은 탑승객이 바닷속 풍경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느린 속도로 이동했고 외부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디스플레이에는 바다의 신비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알렉스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음미했다. 해저의 산호초들은 색색의 빛을 발하며 물속을 춤추듯 움직였고,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이 마치 은하계를 유영하는 별똥별처럼 캡슐 주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오징어와 저 멀리 고래 한 무리가 우아하게 헤엄치는 모습도 보였다.
몇 분이 흐르고 알렉스가 슬로우 버튼을 해제하자 캡슐은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부 조명이 꺼지고 화면에는 어두운 바다의 풍경만이 보이게 되었다.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대신, 알렉스는 캡슐의 움직임 상태를 ‘정지 모드’로 바꾼 후 눈을 감았다.  
알렉스는 그동안 무리를 해가며 일했던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의식 저편에 감추어져 있던 오래된 기억은 오히려 또렷하고 생생하게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와서 알렉스는 말똥말똥한 상태가 되었다. 그의 생각은 먼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은 여전히 알렉스의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절, 알렉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슴에 품었으며, 그때 가졌던 꿈과 열정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때, 그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으며, 언젠가 자신이 과학기술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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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알렉스의 안식처는 지역 도서관의 조용한 구석, 서가 사이의 좁은 통로들이었다. 그곳에서는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고, 오로지 종이의 냄새와 부드러운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느껴졌다.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해 언제나 외로웠던 알렉스에게 책들은 그의 오래된 유일한 친구였다. 책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복잡한 감정을 알아챌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무한하고 흥미로운 지식의 세계로 그를 인도했다.
알렉스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어느 날, 그는 지역 도서관의 한켠에서 한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 역시 그처럼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녀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고, 학교가 끝난 후 도서관에 가면 알렉스는 언제나 책을 읽고 있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즈넉한 도서관의 빛바랜 햇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그림 속에서 나온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그런 소녀의 모습은 알렉스의 뇌리에 박혀, 이윽고 소녀는 그의 고요한 내면세계에 커다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책, 재미있어?”
어느 날, 소녀가 알렉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알렉스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언제나 말을 걸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한마디 말조차 건네지 못하고 있던 제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이었다!
소녀는 알렉스가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을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코스모스’라는 유명하고도 오래된 고전적인 과학 서적으로, 소녀 역시 오래전 흥미롭게 읽은 책이었다. 알렉스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응, 재밌지….”
“나도 이 책 진짜 재밌게 읽었어. 인공지능도 없던 그 옛날에 이런 것들을 벌써 알아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우주의 미스터리에 대해 생각하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이야. 얘, 너도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하니?”
“응, 있다고 생각해. 너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지! 이 넓은 우주 공간에 우리 인간만 존재한다는 건 너무 큰 공간의 낭비니까.”
알렉스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또래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넌 이름이 뭐야?”
알렉스가 누군가에게 이름을 먼저 물어본 것은 이번이 생애 처음이었다.
“내 이름은 김나은이야. 너는?”
“내 이름은 알렉스 리(Alex Lee). 한국 이름은 이종혁이야.”
“만나서 반가워, 종혁아. 원래는 외국에서 살았어?”
“응, 원래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어. 엄마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아빠는 인도 사람이야. 엄마, 아빠가 헤어지면서 한국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하고 같이 살게 됐어.”
그날 이후, 그들은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만나 서로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은은 알렉스의 유일한 또래 친구가 되었다. 평소 타인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알렉스는 또래와 상호작용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어 왔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고는 했다. 나은은 알렉스가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나은 역시 지독한 책벌레였고 자신이 꽂힌 주제에 오래도록 파고들며 그것을 완전히 마스터할 때까지 공부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패턴을 찾는 데 집착했고, 이 세상의 체계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온갖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넘쳐나는 것도 비슷했다. 무언가에 몰두하면 주변에서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전혀 들리지 않는 것도 똑같았다.  
알렉스는 어릴 적 자폐 스펙트럼의 경향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오랫동안 자폐 치료센터에 다닌 적이 있었다. 알렉스의 세계는 언제나 정해진 패턴과 순서대로 흘러가는 천체의 궤도처럼 명확하고 질서정연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표정을 분간하고 읽음으로써 그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알렉스에게 있어서 복잡한 암호를 해독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 어려웠다.
이런 그의 모습은 초기 AI 컴퓨터와도 흡사한 점이 있었다. 계산을 하고 사실을 기억하는 능력에서 그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데이터와 숫자, 공식들이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빌딩 블록이었고, 이를 통해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사회적 맥락과 감정의 뉘앙스, 숨겨진 의미,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암묵적 규범 같은 것들을 읽어내는 일은 그에게 언제나 큰 도전이었다. 특히 사회적 상호작용의 미묘한 뉘앙스는 그에게 늘 헷갈리는 수수께끼였다. 그런 성향으로 인해, 알렉스는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된 섬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과 어딘가 다른 알렉스를 이질적인 부유물처럼 여기며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그럴수록 알렉스는 도서관의 조용한 안식처로 도피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알렉스와 또래 아이들 사이의 간극은 더욱 커져만 갔다.
반면에 나은은 이런 면에서 알렉스보다 훨씬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나은은 알렉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알렉스의 세계가 한 개의 ‘강’이라면, 나은의 세계는 여러 강이 모여 이룬 하나의 ‘바다’와도 같이 훨씬 넓고 깊었다. 나은은 초등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많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나은의 모습은 알렉스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빛나는 섬과 같았고, 자신과 같은 존재처럼 보였던 나은이 그럴 때면 너무 낯설게 느껴져 알렉스는 견딜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고는 했다.
나은이 친구들과 어울려 어딘가로 놀러 가는 날이면, 알렉스는 도서관에 혼자 있는 것이 싫어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 문제를 풀거나 퍼즐 맞추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알렉스의 관심사는 항상 명확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는 수학과 과학, 퍼즐과 암호 풀기에 깊은 열정을 가졌고, 이는 나중에 그가 암호학 박사이자 프로그래머로서 뛰어난 적성을 발휘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세계는 이론의 우아함과 논리의 체계 속에서 가장 생생하게 꽃을 피웠다.
반면, 나은의 지적 호기심은 별들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처럼 광대했다. 그녀의 지적 호기심은 알렉스의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역사와 사회, 철학과 소설,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항상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갔다. 나은의 생각은 고대 철학자의 묵상처럼 깊었고, 그녀의 상상력은 신화 속 이야기처럼 풍부하고 다채로웠다. 나은의 세계는 알렉스의 것보다 훨씬 넓고 깊어, 그 깊이는 때때로 그를 압도했다. 나은은 알렉스에게 없는 사색의 폭과 문화적 풍부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차이는 나은이 알렉스와 달리 ‘다른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사실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나은과의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나은을 통해 그녀의 시각으로 세상을 함께 보는 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알렉스의 세계 역시 조금씩 넓혀질 수 있었다. 나은과의 교류는 알렉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활짝 열어젖히는 역할을 했다. 그의 세계에서 나은은 마치 별빛처럼 반짝이는 존재였다. 그녀와 함께할 때면, 그의 정적인 세계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은에게는 알렉스와 공유하는 책과 과학, 수학의 세계 너머에도 다른 세계들이 존재했다. 그녀의 삶은 다채로운 색깔의 팔레트로 가득 차 있었고, 다양한 관심사와 친구들이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알렉스는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나은의 세계는 항상 그를 초대하지는 않았다. 나은이 친구들과 웃으며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알렉스는 종종 자신이 그림의 한 구석에 그려진 작은 그림자 같다고 느꼈다. 그의 세계는 수학의 정확한 계산과 과학의 논리로 정교하게 짜여 있었지만, 나은의 세계는 더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삶이 나은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빈틈 없는 조화와는 달리, 어딘가 항상 2% 부족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은이 그를 떠나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낼 때면, 그는 자신의 삶을 채우려 더욱 책 속에 파묻혔지만, 책 속의 지식과 이론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27 04:3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