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였던 나는 버스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버스가 숲길을 뚫고 예비군 훈련장에 막 도착하려 하고 있었다. 

훈련장 앞은 군복을 걸친 군인들과, 너덜너덜한 부대마크, 칠이 벗겨진 바리케이드 같은 잡다한 것들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드디어 또 부대에 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버스가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부대 안의 스피커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육군 10대군가 중 하나인 <멸공의 횃불(Myeolgong eu Hwaetbool)> 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날 혼란 속에 빠뜨렸다. 

순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두통에, 나는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대로 꼼짝 않고 있었다. 

이윽고 이등병 조교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어디 불편한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요새 군대는 많이 좋아졌나봐요. 요자도 쓰고."

조교는 굳은 얼굴로 가버렸고, 나는 짬좀 되어보이는 조교에게 넌지시 이 사실을 전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왜 여기에 와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잊고 싶은 기억, 잃어버린 20대, 제대하거나 혹은 민방위로 빠져버린 사람들, 벌써부터 느리게 돌아가는 국방부의 시계,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장구류를 받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줄곧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부대는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부지는 넓었고, 주위는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에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늘어져 있었다. 1층에는 식당과 내무실, 2층에는 몇 개의 내무실과 체육실, 건물 옆에는 탄약고가 있었다.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건 다 갖추어져 있었다. 


이 건물의 유일한 문제점은, 내가 2박3일동안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복도 중앙에는 커다란 액자에 복무신조가 적혀져 있었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여기까지 읽고 머리가 아파진 나는 그 커다란 글자들을 읽는 걸 그만두었다. 

내무실 안에는 침상과 관물대, 자그마한 TV와 책장이 있었다. 관물대에는 방탄헬멧과 탄띠, 군장, 그리고 모포와 매트리스가 갖춰져 있었다. 


책장에서 나는 낯익은 책을 한 권 발견했다. 현역시절 나에게 최고의 책은 <맥심>이었다. 

현역 시절 나에게 있어 최고의 책은<핑클도 아는 우리의 주적>이었는데, 몇 번 되풀이 해 읽는 사이에 그것은 광채를 잃게 되었고,

<맥심>에게 베스트 원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그리고 <맥심>은 그후 줄곧 내게는 최고의 책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책꽂이에서 <맥심>을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고는 했다. 

단 한 번도 실망을 맛본 적이 없었을 만큼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페이지는 없었다. 


침상 한 끝에 걸터앉아 <맥심>을 보고 있자니, 낯선 사내가 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느냐고 물어봤다. <맥심>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냐고 그는 물었다.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했다.


"<맥심>을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과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첫 날의 일이었다. 


그리고 훈련이 시작되기 얼마 전, 나는 잤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는지 아닌지 나로선 알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도 역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 밖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지쳐있었고,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저 자리에 누워서 자기를 원했다. 날 흔드는 조교의 손때문에 난 잠에서 깨어났다. 


"선배님 나가셔야 됩니다."

"좀 지쳤는걸?"

"그래도 나가셔야 됩니다."

"글쎄, 아직 그러고 싶진 않아. 좀 더 누워 있을까?"

스피커에선 <전선을 간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슬슬 훈련이라도 받아볼까, 나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내무실 밖을 나서려는데 다시 그 조교가 들어왔다. 


"선배님들 탄띠랑 군장 챙겨서 나오셔야 됩니다."

"농담이지? 저렇게 크고 딱딱한 것, 난 들 수 없어. 나 부셔져버려."


곤란해 하는 조교의 얼굴을 보는게 재미있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우리는 훈련을 받으러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훈련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반납하지 않은게 발각되어 퇴소조치를 당했고, 그 후로 다신 그를 볼 수 없었다. 


연병장 한 구석에 앉아 수류탄 모형을 들고 설명을 하고 있는 조교를 보면서 나는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했다. 

집에서 먹다 말고 내버려둔 샌드위치, 밀린 핸드폰 요금, 곧 있으면 시작될 온라인게임의 이벤트 따위를 생각했다. 


"선배님. 듣고 계십니까?"

"물론."

"그럼 방금 드린 설명도 들으셨습니까?"

"물론이지."

"뭐였습니까?"

"수류탄? 아주 강력하지. 산이 무너져 온 바다가 메워질 만큼."

".. 진심이십니까?"

"응. 정말이야. 온 세상의 나무가 쓰러질 만큼 강력해."

그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각개전투훈련이 있었다. 난 훈련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고 풀숲 사이에 누워 잠이들었다. 

어디선가 뚜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뻣뻣하게 느껴지는 중년 남성이 모습을 나타냈다. 

전부 다 보이진 않았지만 전투모 아래로 내려온 짧은 머리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국방색 전투복과 잘 길드여진 전투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동대장이었다. 그는 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교육태도가 아주 불량하다면서요?"

"그렇군요."

"당신같이 젊은 예비군은 잘 모르나본데 이대로 가다간 강제퇴소 당할지도 몰라요."


난처하게 됐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대답대신 그는 관자놀이에 손을 얹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머릿속을 정리라도 하는 것처럼. 

사격장에선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격훈련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난 천천히 울리는 총성의 횟수를 세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일 곱 발쯤 총성이 울렸을 때, 나는 사정했다. 



다행스럽게도 강제퇴소만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당분간 잠자코 지냈다. 

퇴소 전 날 밤, 우리는 모두 모여 교통비를 걸고 고스톱을 쳤다. 군용모포에 화투짝은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처럼 짝짝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지독하게도 운이 없는건지 나는 연달아 돈을 잃었다. 나는 보급계원을 구워삶아 얻은 맛스타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맛스타가 정말 맛있군요"하고 내가 말했지만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치 지옥과도 같은 뻘쭘함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나는 생각하는 걸 멈추고 마치 퍼즐을 맞추듯 화투짝 그림을 맞춰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술렁거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리에는 새가 그려진 화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완성을 위한 마지막 한 장의 패를 

내가 들고 있었다. 


약간은 긴장된 모습을 감춘채 나는 5점을 얻기위해 마지막 한장의 패는 내리쳤다. 그리고 뒤집어져 있는 패를 한장 살짝 들어올렸다. 

조커였다. 등줄기에서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 번 패를 들어올렸을 때 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 패였다.


"쌌구나."

"잔뜩 쏟았어."


주변이 웅성거렸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고도리.. 꼭 완성하고 싶었다. 고도리 말고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눈에 비치는 건  순서를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 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고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출처 :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umorbest&no=1124523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7-08 00: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