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산 갈매기들의 야구 사랑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스포츠에 대한 열정입니다. 여러 스포츠 중에서도 부산 시민들에게 으뜸가는 인기를 얻는 것은 명실상부 야구입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롯데 자이언츠를 향한 응원은 다른 프로야구팀 어느 곳과 비교하더라도 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보스턴 레드삭스, 일본의 한신 타이거스가 받는 응원에도 못지않습니다.
종종 야구의 수도, 일명 ‘구도’로 일컬어지는 부산의 야구 열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홈구장인 사직 구장 경기 도중 울려 퍼지는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의 응원가나 상대 투수의 견제구에 대한 ‘마’ 야유는 부산 야구 열기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종종 도를 넘어선 기행으로 비하의 대상이 될 때도 있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에 한국 프로야구의 흥행이 달려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올 만큼 롯데 팬들의 야구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프로야구 원년에 창설된 롯데이니만큼 무수히 많은 선수가 팀을 거쳐 갔으며 부산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선수들 역시 여럿 존재합니다. 그중에서도 팀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인 1선발 에이스들은 롯데의 역사를 써온 주역들입니다.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 ‘꾀돌이’ 주형광, ‘염슬라’ 염종석, ‘민한신’ 손민한 등 수많은 별의 가장 처음이자 꼭대기에 있는 이는 바로 ‘철완’ 최동원입니다.


2. 무쇠팔 사나이
학창시절부터 전국을 호령하던 투수였던 최동원은 연세대 재학 시절 고연전에서 무시무시한 구위를 선보이며 활약합니다. 그의 소문은 바다 건너 미국까지 다다랐고 그의 투구를 지켜보기 위해 여러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최동원을 지켜봅니다. 실제로 좋은 대우의 계약을 제시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경우도 있었지만, 병역 문제와 야구 흥행을 우려한 고위 인사들 등이 발목을 붙잡아 실업야구팀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하게 됩니다.
실업야구 최고의 투수로 자리매김한 최동원은 1982년 세계선수권 출전을 위해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해야 했고 김재박, 장효조 등의 다른 전설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원년 시즌에 데뷔하지 않습니다. 한국전력공사에서 잠시 활동한 후 1983년 이미 프로구단으로 전환된 롯데 자이언츠에서 다시 입단한 그는 드디어 프로선수로 데뷔합니다.
그의 첫 시즌은 예상과 달리 아쉬움 속에 마무리됩니다. 원년 투수진을 이끌었던 노상수와 천창호의 부진, 허약한 하위타선 등의 팀 전력상 열세와 연봉 협상으로 제대로 몸관리를 하지 못한 최동원 자신의 문제로 인해 9승 16패의 성적을 거둔 것입니다. 물론 200이닝 넘게 던지며 2.8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것들을 염두에 두면 비난받기엔 서운한 성적이었지만 최동원은 절치부심하며 하루에 공을 1000개 넘게 던지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3. 리그를 폭격하다
최동원 이전 프로야구를 평정한 투수들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선수들이었습니다. 1982년 리그 최고의 투수는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 베어스의 에이스 ‘불사조’ 박철순이었습니다. 최동원과는 연세대 선후배 사이였으나 기합 명목으로 최동원을 폭행했던 악연이 있던 박철순은 미국 무대에 진출했던 실력자였습니다. 기묘한 궤적의 팜볼을 앞세워 24승과 평균자책점 1.82를 기록함과 동시에 22연승이라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대단한 기록을 보유한 그는 OB 베어스의 원년 우승 선봉장이었습니다.
1983년 최동원 대신 리그 최고의 투수로 활약한 것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너구리’ 장명부였습니다. 재일교포로 이미 일본 프로야구에서 준수한 선발투수로 활약했던 그는 능구렁이 같은 완급조절과 수싸움으로 무려 400이닝을 넘게 던지며 완투 36회와 함께 30승을 거둡니다. 모두 현재까지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은 불멸의 기록들입니다. 초창기 선수관리의 개념이 희박했던 프로야구였기에 가능했던 기록이며 다시는 이에 근접한 기록이 나올 수도, 나와서도 안 되는 살인적인 혹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만반의 준비 끝에 1984년을 맞이한 최동원은 이전의 두 투수에 절대 뒤지지 않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칩니다. 그가 거둔 27승과 284이닝은 박철순을 넘어서 지금까지 역대 2위의 기록이며 삼진 223개는 장명부마저 넘어선 역대 최고의 기록입니다. 역동적인 투구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속구와 폭포수를 연상시키는 낙차의 커브에 타자들의 방망이는 어김없이 헛돌았습니다. 투수력이 부족한 팀 사정상 선발뿐 아니라 중간 계투, 마무리로도 출전하는 엄청난 혹사에도 그는 던지고 또 던지며 롯데의 수호신이 됩니다.


4. 사자 군단의 오만
1984년 프로야구는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진행방식이었습니다. 리그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각각의 우승팀을 뽑아 한국시리즈에서 자웅을 가리는 방식으로 전기 우승팀은 삼성 라이온즈였습니다.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최하위를 기록한 적 없는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는 원년부터 강팀으로 자리매김한 팀이었습니다.
1982년 OB에게 당한 통한의 준우승 이후 자신들을 꺾었던 김영덕 감독을 선임할 정도로 우승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삼성은 1984년 리그를 여유롭게 제압합니다. 에이스 김시진과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의 리그 최고 원투펀치, 타격 트리플 크라운에 빛나는 역대 최고의 포수 ‘헐크’ 이만수, 역대 최고 통산 타율의 주인공인 ‘타격의 달인’ 장효조 등 무수한 별의 향연이었던 삼성 선수들은 전기 리그를 큰 격차로 우승합니다.
이만수의 타격 1위를 위해 롯데의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 포함 10연타석 볼넷으로 출루시키는 등 기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던 김영덕 감독은 부끄러운 결정을 합니다. 자신의 친정팀이자 삼성 감독 선임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김성근 감독의 OB를 밀어내고자 후기 리그 우승 경쟁팀인 롯데를 상대하며 2군 선수 기용과 의도적인 실책 플레이로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단행한 것입니다. 이미 전기 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데다가 상대적으로 롯데가 쉬운 상대라고 무시했기 때문에 한 결정이었습니다.


5. 최동원의,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한국시리즈
마침내 찾아온 1984년 한국시리즈. 최강팀 삼성을 상대하게 된 롯데는 분명 상대적으로 약팀이었습니다. 특히 투수진의 열세는 삼성이 우승을 위해 롯데를 밀어준 이유일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이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로 한국시리즈 1, 3, 5, 7차전에 모두 최동원을 선발로 기용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누가 봐도 엄청난 혹사인 기용에 최동원은 반발했으나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라는 강병철 감독의 호소에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라고 대답하며 결의를 다집니다.
1차전 최동원과 김시진의 대결은 한국시리즈 최초의 완봉승을 거둔 최동원의 승리였습니다. 김시진은 경기 전 일어난 교통사고로 인해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상황이었고 최동원의 역투는 불을 뿜었습니다. 2차전 김일융에게 맞서 안창완, 임호균 등의 투수가 등판하지만 역부족이었고 롯데는 경기를 내줍니다. 1차전 이후 고작 이틀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격돌한 최동원과 김시진. 두 에이스는 치열한 투수전을 펼쳤지만 8회 타구에 발목을 맞은 김시진이 쓰러지면서 3차전은 최동원의 완투승으로 종료됩니다.
4차전을 또다시 김일융에게 내준 롯데는 다시 5차전 선발로 최동원을 기용합니다. 최동원은 한 번 더 완투하며 최선을 다하지만, 김시진의 부상으로 대신 등판한 권영호의 분투와 하루 쉬고 나온 김일융의 구원 등판으로 롯데는 탈락 직전까지 몰립니다. 한국시리즈가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난 상대는 진통제 투혼을 보여준 김시진이었습니다. 선취점을 내주며 끌려가던 롯데는 간신히 역전을 이루지만 분전하고 있던 임호균의 손가락 부상이라는 위기를 맞닥뜨립니다.
모두가 포기하던 순간, 철완은 전설이 됩니다. 전날 완투한 최동원은 5회부터 구원 등판하면서 9회까지 단 3안타만 허용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펼칩니다.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요. 때늦은 가을비가 내리며 경기가 연기되어 하루의 휴식을 취한 최동원은 7차전의 선발로 나서서 김일융과 대결합니다. 두 투수 모두 한국시리즈 3승을 거두며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정신력으로 버티는 승부가 이어집니다. 승리의 여신이 롯데에 미소지은 것은 8회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이 터진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장태수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최동원은 5경기 등판 및 4경기 완투, 4승 1패와 40이닝, 평균자책점 1.80이라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기록과 함께 감동의 우승을 거머쥡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한계를 넘어선 혹사는 결국 철완을 녹슬게 합니다. 최동원은 1985년 20승과 1986년 19승을 거두고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성장한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 막상막하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활약을 이어갔으나 구위는 점점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연봉 협상과 선수협 결성 등을 두고 롯데 구단과 엄청난 갈등을 빚은 최동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꺾은 삼성으로 쫓겨나듯 트레이드됩니다. 은퇴 후 정치계, 방송계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최동원은 한화 이글스에 코치로 부임해 ‘괴물’ 류현진의 성장을 돕는 등 지도자의 길을 걸었으나 대장암으로 인해 2011년 “공을 던지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며 눈을 감습니다.
고인을 추모하는 팬들의 추모 열기가 이어지며 롯데 구단은 뒤늦은 화해의 손길을 내밉니다. 영구 결번 지정, 고인의 아들과 어머니의 시구자 선정, 동상 제작 등의 예우 등이 이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잡음을 빚어 팬들의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1992년 윤학길, 주형광 등의 활약으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 이후로 한 번도 우승을 거두지 못한 롯데의 현재는 다음 글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https://www.koreapas.com/m/view.php?id=gofun&no=210479

-----------------------------------------------------------------------------

P.S.
올해는 장마도 태풍도 한 박자 뜸 들이다 지나가는 것 같네요. 아무쪼록 모두 큰 피해 없이 편안한 일상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번 글은 재밌게 읽으셨는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고인의 열정은 요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 발짝 쉬어가는 여유도 잊어선 안 되겠죠. 주말 동안 재충전하시고 다시금 기운 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27 17: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