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웃게에 금돼지 식당 이야기가 나오면서 제가 거기다 댓글을 달았는데
거기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셔서 생각보다 놀랐습니다
원래는 어제 업로드할 예정이었는데, 친구들하고 술 잔뜩먹고 뻗어버리는 바람에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쓰겠다고 했으니 열심히 써서 올려봅니다.
우선, 이 본문의 내용은 "대한민국 돼지산업사" 라는 제목의 책과 관련 뉴스를 교차검증하여 구성하였습니다.
글 하나로 다 끝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한번 해보도록 하죠.
이 글을 보기전에 삼원교잡종에 대해 다룬 글 https://www.koreapas.com/bbs/view.php?id=gofun&no=292909 을 보고오시면 좋습니다.
1.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까지 돼지의 역할
일단 한국전쟁 이전을 다루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일제가 고기가 잘 나오는 요크셔종을 조선에 보급하려고 시도했다는 둥 뭐 그런게 있는데 전쟁 이후 싹 다 털리고 남은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요.
당시 농촌에서 기르던 가축은 주로 소 돼지 닭 말 개 정도입니다. 소나 말의 경우 농사에 직접 사용하기도 하고 교통 및 운송수단도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닭은 알을 낳고, 개는 집을 지키고, 돼지는 음식물 쓰레기, 사람의 분변, 농업 부산물(쌀겨, 보릿겨 등등)을 먹어치우고 비료를 배출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양 토끼 염소 사슴 오리 이런 건 전문적인 축산업이 생긴 뒤에야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고기는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명절이나 제사와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에 고기가 제례용으로 쓰인 다음 나눠먹는거였죠. 자, 그럼 이때 뭘 잡아먹어야 할까요? 고기가 있긴 있어야하고, 소나 말을 잡았다간 큰일나니 당연히 닭, 개, 돼지가 육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돼지가 먹는게 뭐죠? 음식물 쓰레기, 사람의 분변, 쌀겨, 보릿겨입니다. 그러면 제일 문제가 되는게 분변을 통해 사람과 돼지 사이를 오가는 기생충이 문제죠.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다는 건 사람과 먹을 것을 공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물간 먹이경쟁의 문제로 이해하시면 편합니다) 그 다음 돼지 자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 그리고 쉽게 상하는 특성까지 있어서 여름에 돼지고기를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 사례는 매우 흔했습니다.
(1957년 6월 9일 경향신문 - 식중독으로 판명, 의성군환자소동의 조사결과)
(1958년 4월 2일 경향신문 - 사망6 중독 79명, 회갑잔치 돼지고기 사건)
(1958년 7월 3일 동아일보 - 32명 중독 1명 사망, 환갑잔치집 돈육먹고)
이렇게 다양한 요소 때문에 돼지는 '필요하긴 한데 먹기는 애매한'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2. 1960년대 인구증가로 늘어나는 고기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축산진흥정책과 1970년대 기업형 축산의 등장
586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로 유명합니다. 인구증가가 매우 급격하게 일어났고, 1960년대 말 소고기 공급부족으로 소고기 파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급하게 '한국축산진흥공사'를 설립하고, '축산진흥계획'을 발표합니다. '축산진흥계획'의 핵심은 농촌에서 자급하는 형태의 축산을 기업형으로 바꾼다. 그리고 국내 수요를 충분히 충당하면 수출로 유도한다. 이 두 가지입니다.
(1966년 4월 15일 조선일보 - 쇠고기값 껑충)
(1967년 4월 21일 매일경제 - 한국축산진흥공사(가칭) 5월초 창립총회)
(1968년 9월 21일 동아일보 - 축산진흥계획 확정)
그런데 실제로 축산진흥계획을 실행해보니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허점이 있었기 때문인데 우선은 소를 중심으로 한 계획이었다는게 큽니다. 사실 소를 그냥 풀밭에 풀어놓으면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거 같지만, 소를 그냥 풀어놓으면 하루종일 되새김질하면서 풀을 씹어먹습니다. 그래야 소화가 가능한 상태가 되고 그래야 영양분을 얻으니까요.
그래서 농사일에 소를 사용하려면 소가 빨리 소화할 수 있도록 볏짚, 말린 풀 같은 걸 물에 끓여서 죽처럼 만들어서 줘야 했습니다. '쇠죽' 이라고 하죠. 그럼 고기를 빨리 얻으려고 소에게 영양분을 공급할 때도 같은 원리가 작용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사료 만드는게 너무 힘들어서 소가 늘어나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구조였던거죠. 지금은 그냥 옥수수 중심의 곡물사료로 해결하지만 1960년대에 사람이 먹기도 모자란 옥수수를 소 키우는데 줄 여력은 없었습니다. 여기에 소고기 파동 이후 가격상한제가 시행되다보니 이득은 적고 결과적으로 축산진흥계획의 대폭 수정이 필요했던거죠.
그래서 정부는 재벌에게 혜택을 주면서 '니네 축산업에 투자해라. 축산용 부지는 부동산투기대상으로 간주하지도 않을거고 혜택도 많이 줄게' 라는 떡밥을 던집니다.
(1971년 4월 10일 경향신문 - 기업화하는 목장)
그리고 삼성이 여기에 부응해서 용인자연농원에 양돈단지를 건설하고 연간 5만 마리 생산을 목표로 제시합니다.
(1973년 5월 4일 매일경제 - 삼성그룹, 연간 5만두 생산)
당시 많은 재벌들이 삼성의 양돈투자에 매우 의아해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선호하던 고기는 소고기였지 돼지고기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돼지의 경우 축산진흥계획에서 약간 후순위에 있던 탓에 당시 돼지 사육농들은 돼지 값이 오르면 돼지를 많이 번식시키고, 돼지 값이 내리면 돼지를 적게 번식시키는 식으로 공급의 변동이 크다보니 가격의 변동폭도 컸습니다.
아마 삼성에서는 이러한 점을 눈여겨보고, 1년에 새끼 1~2마리를 낳는 소에 비해 1년에 30마리씩 새끼를 낳는 돼지가 공급을 증가시키는데 유리하고, 공급이 안정화되면 돼지고기 가격을 '정부의 상한선'에 가깝게 유지하면서 남는건 수출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삼성의 이런 시도는 대성공이었고 종돈공급, 사료생산, 도축, 부산물 처리까지 축산의 광범위한 부분을 수직계열화하는데 이릅니다. 지금 현재 축산시장에서 기업단위로 이런 수직계열화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하림 정도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현재 CJ제일제당의 육가공 사업부문이 이 수직계열화의 흔적입니다. (마트나 인터넷에서 보시면 의외로 CJ제일제당이 만든 육가공 제품이 많습니다)
3. 제주에서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일어난 축산혁명
전국 단위에서는 양돈사업이 이렇게 시끌시끌한 변화를 경험하는 가운데, 제주도에서는 무려 10년 빠른 1962년부터 기업형 양돈사업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이름 임피제,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님이 주도한 농촌개발 덕분입니다. 이 분은 한국 정부에서 한국에 기여한 공로가 큰 외국인에게 주는 명예국민 자격을 받은 네 분중에 한 분입니다. 비록 선종한 뒤에 받으시긴 했지만요.
잠깐 사족이지만, 명예국민 자격을 받은 분들이 "소록도의 천사" 마가렛 피사렛 간호사님과 마리안느 스퇴거 간호사님,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신화" 거스 히딩크 감독님, 그리고 "돼지 신부"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님입니다.
임피제 신부님은 1954년에 제주에 사제로 부임하셨고, 성당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제주도 농민들의 어려움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빚을 갚지 못해 자살한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자살을 교리로 엄격히 금지합니다) 신자의 사연을 접하고는 "단순히 선교만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신앙생활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돼지에서 찾았습니다.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제주도에 적용하기로 마음먹은거죠.
경기도 계엄사령관 앤더슨 대령을 찾아가 부탁을 거듭하여 임신한 요크셔 암컷 한 마리를 얻어 제주도로 돌아오니 그 돼지는 한림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새하얗고 커다란 꽃돼지"를 구경하러 제주시에서 한림성당까지 오기도 했죠. 참고로 지금 제주시에서 한림까지는 차로 45분 내외가 걸립니다. 차로 45분 거리면 걸어서는 뭐... 생략하겠습니다. 그만큼 신기했단 소리죠.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는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한림성당 마당에서 요크셔 암컷 한 마리로 시작한 돼지가 어느새 20마리가 되자 성당 마당이 어지러워지고 돼지 울음소리에 돼지냄새가 진동하니 마을 주민들과 신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래서 새로 돼지를 키울만한 장소를 모색했죠.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이 주둔했던 '정물' 이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깨끗한 물이 잘 나오고, 버려진 군 막사를 축사로 개조하면 딱이겠구나 라고 생각한 임피제 신부님은 아일랜드의 고향 친구들과 가족 친척들에게 일대 땅을 사들일 수 있게 돈을 부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십시일반으로 모인 돈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정물 주변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죠. 그리고 소문이 퍼지자 그 주변 땅주인들이 찾아와서 자기 땅도 사달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땅주인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외국인 신부한테 쓰지도 못하는 땅 팔아서 돈 벌었다" 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들인 땅이 한때 아시아 최대의 양돈단지 250만평의 이시돌 목장(당시 명칭은 이시돌중앙실습농장)이 됩니다. 이 때가 임피제 신부님이 부임한 후 7년이 지난 1961년 입니다.
아직 삼원교배종의 개념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에 본격적으로 고향 아일랜드로부터 삼원교배종을 도입하고, 돼지의 역한 냄새를 잡기위해 깨끗한 물을 제공하고 배합사료공장을 세웁니다. 삼원교배종의 유지를 위한 종돈, 모돈의 관리, 수컷 돼지의 냄새를 없애기 위한 거세과정 도입, 돼지의 생육을 관리하기 위해 돼지마다 고유 식별번호를 찍고 매달 체중을 기록하는 등 양돈관리가 체계화됩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도축공장을 세워 부위별로 유통하는 부분육 유통도 시행합니다.
제주 이외의 지역에서 돼지용 배합사료 공장이 세워진게 1980년의 일이니 20년은 앞서있었던 것이죠.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시돌 목장을 두 번이나 방문하면서 앞에서 소개한 '축산진흥정책'이 계속해서 실패하는 와중에 제주도는 어떻게 스스로 성공했는지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농고생, 농대생들이 선진 축산기술을 배울 수 있게 실습환경 조성에 나서기도 합니다.
(1973년 2월 18일 조선일보 - 짙은 안개속에 목장 방문)
(1973년 6월 6일 매일경제 - 제주도민들의 목장개발 촉구 박대통령)
이시돌 목장에서 돼지만 키운 것은 아닙니다. 면양을 키워 얻은 양털을 제주도민들이 가공해서 팔기도 하죠. 한때 국산 명품으로 유명했지만 2004년 폐업한 '한림수직'이 이시돌 목장에서 얻은 양털을 제주도민이 가공해 파는 형태였습니다. 당시 한림수직에서 일하려면 엄격한 교육과정을 거쳐 실기시험에 합격해야 했는데 그 덕분에 1980년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앞선 품질관리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기회가 있으시면 부모님들한테 '한림수직' 아시냐고 한번 여쭤보세요.
축산하면 빠질 수 없는 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250만평이나 되는 넓은 목초지에 4계절 방목해서 얻은 신선한 우유를 제주도민들에게 제공하고 이걸 가공해서 치즈로 만들기도 합니다. '효리네 민박' 에서 이시돌 목장에서 자유롭게 노는 소들이 나오는데 제주도 출신 입장에서 참 뿌듯했습니다.
이렇게 제주도 뿐만 아니라 국내 축산기술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했던 이시돌 목장은 1990년 1000마리 이상의 돼지사육을 금지하는 정부의 '축산법시행규칙 개정안'에 따라 돼지사육을 포기하고, 대신 보유했던 돼지들을 제주 축산농가에 거의 무료에 가깝게 분양하면서 동시에 사육기술, 관리기술을 전수합니다.
기업형 양돈에 뛰어든 삼성 역시 1990년에 보유한 돼지를 모두 처분하면서 한국의 기업형 양돈은 일단 종말을 고합니다.
4. 회사는 사라졌지만 사람과 기술은 남았고, 양돈산업은 계속 발전했다.
기업형 양돈이 사라지게 된 계기인 돼지 파동은 '돼지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너도나도 양돈에 뛰어든 것이 그 원인입니다. 결국 돼지가격이 폭락하는데, 영세농가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양돈 농가의 사육두수를 1000마리로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됩니다. 그래서 이시돌 목장도, 삼성의 양돈단지도 사라지게 되었죠.
하지만 그래서 정말 모든게 끝났을까요? 회사는 사라졌지만, 거기서 근무하던 직원들이 돼지를 분양받아 선진기술을 적용하는 전업 양돈농가가 여기저기서 등장하게 됩니다. 삼원교배종을 기반으로 배합사료를 급여하고, 거세한 규격돈을 도입하는 등 기업형 양돈에서 사용된 기술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고 사용되면서 "돼지고기는 냄새가 난다" "돼지고기는 기생충을 조심해야 한다"와 같은 고정관념도 점점 깨지기 시작하죠.
이런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등장한 게 바로 삼겹살입니다. 한국인들이 소고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지방질이 많아서 입니다. 한우의 등급제도와 미국산 소고기의 등급제를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한국인의 유별난 마블링 선호' 입니다. 그런데 지방질이 많은 삼겹살이 소고기보다 싸면서 냄새도 안 나고 기생충도 없고 맛도 좋다? 당연히 먹어야죠.
황모 칼럼니스트가 "한국인이 삼겹살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불행한 역사가 있다" 라고 방송에서 이야기 했었는데,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삼겹살을 너무 선호하다보니 등심과 안심이 안 팔려서 수출된 것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돼지고기 중 삼겹살의 비율이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40~50% 수준입니다. x교익 씨가 방송에서 했던 말하고 정면으로 대치되는 자료죠.
뭐 이렇게 선진양돈기술이 확산된 이후에는 우리 모두가 아는대로 입니다. 한돈이 브랜드화 되고, 돼지농가들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고, 우리는 맛있는 돼지고기를 냄새걱정 없이 잘 즐기고 있습니다.
5. 한돈산업에 남은 숙제
양돈업계에선 '이베리코 사태'라고 표현하는데, 삼원교배종 중심이던 한국 양돈산업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로 다양성의 부족이죠. 제주도는 이미 2000년대 들어 토종 흑돼지와 다른 종을 교잡하면서 맛도 좋고 생산성도 우수한 제주 흑돼지를 개발해서 활로를 꾀하고 있지만 전국 단위로 보면 아직 품종의 다양성은 부족합니다. 최근 농촌진흥청에서 토종돼지 복원사업을 통해 토종돼지와 다른 돼지들을 교잡해서 생산성을 높인 축진요크, 축진듀록, 축진참돈 등 품종개발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인 부분입니다.
제가 이 분야 전문가도 아니고, 책 하나 읽었고, 제주도민으로써 이시돌 목장을 좋아하다보니 이시돌 목장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그 다음엔 뉴스검색하면서 글 내용을 보충한 것 뿐 입니다. 사실관계와 다른게 있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중간 짤도 넣고 그러고 싶은데, 고파스에선 그렇게 글쓰기가 안 되다보니 글만 주구장창 나열한 재미없는 글이 된 거 같습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우리 돼지고기 많이 사랑해주시고, 이시돌 목장 꼭 가보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30 12:00:53:
